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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드라마, 관계)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4)

by 구운체리 2022. 2. 4.

4.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마법처럼 해결된 것은 아니다. 몸에 밴 안 좋은 습관들은 가끔씩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뇌를 거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질때가 있었고, 규민은 이제 갓 태어난 새끼짐승처럼 세상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다보니 넘지 말아야 할 선들을 실수로든 고의로든 종종 밟으려고 했다.
 예전같았으면 그가 선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하게 아이들이 먼저 일찌감치 그를 밀쳐내 선을 밟는 사고가 나지 않았겠지만, 변한 상황에 대한 연습이 되어있지 않은 채로 규민이 선에 다가가니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몰라 허둥대다 갈등이 빚어지고는 하는 양상이었다.
 규민이 모르게 ‘이제부터 규민이에게 잘해주자’는 합의가 된 듯한 모양새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을 오냐오냐 용인해주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화를 내야 적당한 선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다.
 이를테면 규민이 막 대화를 트기 시작한 ‘유은’이라는 여학생을 조금 짓궂게 놀리고 싶어한 일이 있다. 적당한 수준의 놀림은 서로의 벽을 허물고 가까운 사이가 되었음에 대한 증거가 되기에 사교에 도움이 된다고 규민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적당한 때와 수준이 잘 학습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어느 날 규민은 마치 반 아이들이 이전까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유은이 작은 실수를 저지르자 거기에 대고 ‘에에엥’하며 사이렌처럼 울부짖기 시작했고 반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하게 식어내리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 지 몰라 당황한 채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지만 꾸준하게 ‘에에엥’거리고 있으니 유은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유은의 주위로 몰려든 여학생들이 그를 밀쳐내며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고, 영규가 그를 끌고나가 정욱에게 데려가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정욱은 규민에게 화장실에서 잠시 찬물로 세수 좀 하고 천천히 들어오라고 한 뒤 반 분위기를 수습했다.
 그날 규민은 옛날의 자신으로 하루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내가 왜 그랬지 하는 회한과, 그런 멍청한 실수로 잠깐의 즐거웠던 꿈이 물거품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걔는 뭐 그런 일로 울고 그러지 하는 원망, 갖가지 나쁜 감정들이 집에 와서도 규민을 괴롭히는데 정욱에게 문자가 왔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 내일 학교와서 유은이한테 사과해. 그러면 다 다시 괜찮아질거야.’
 규민은 정욱을 정말 멋진 친구라고 생각했고, 나중에라도 필요하다면 그를 위해 목숨만을 제외한다면 무엇이든 바쳐 은혜를 갚겠노라 다짐했다. 정욱의 말대로, 그토록 간단한 사과 한 번에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학급의 친구 ‘박은혜’에게 저지른 만행은 보다 심각했다. 성적인 농담을 일삼는 남자아이들이 이름을 소재삼아 뒤에서 몰래 수군대던 저질스러운 농담을 듣고 재미있다고 생각해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은혜의 바로 옆에서 지운과 농담을 주고받던 중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버린 것이다. 
 은혜는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안 좋아지더니 다음 쉬는시간에 말없이 조퇴를 해버렸다. 그 날 이후로 일부 여자아이들이 자기를 멀리하는 것을 느꼈고, 지운을 비롯한 장군네 패거리가 조금씩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조금씩 친구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하며 규민은 잠깐 찾아온 마법의 효력이 사그러들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규민이 이제야 특별하지 않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적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규민은 미처 몰랐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런 식으로 잘못과 그에 따른 갈등을 빚고 그 결과를 소화해가면서 자라왔으니, 서로 싫어하는 마음도 사회생활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것을, 규민은 이제서야 자연스럽게 학습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규민을 위기에 처하게 한 것은 정욱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었다. 요며칠사이 정욱의 열렬한 팬이 된 규민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기록해두고 싶어했는데, 어느 점심시간에 정욱이 장군네 패거리들에게 둘러쌓여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해버렸다.
 평소에 정욱과 장군은 썩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편이었다. 서로의 영역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마음먹는다고 쉽사리 넘겨먹을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던 이유도 있다. 장군은 소위 말하는 노는 무리의 대장이었지만 탈선의 범주가 성실한 학생의 그것을 넘지 않았고,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정욱이 싸움을 제법 잘해서 장군과 비슷할 것이라는 의견이 팽팽했었다.
 아무리 정욱이 싸움을 잘한다해도 다구리 앞에서는 장사가 없지 않을까? 규민은 발을 동동 구르며 선생님을 부를까 하다가 몰래 뒤쫓아가는 편을 택했다. 무엇을 어쩌려고 한 것인지는 스스로도 몰랐지만. 생각보다 분위기가 험악해보이지는 않았지만 편안한 느낌도 아니었기에, 규민은 정욱이 사실 저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을 쌓고 있었던 것인가 하며 긴장을 풀려고 했다. 세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그 모범생 정욱이 장군네 패거리와 어울려 담배를 필 리가 없지 않은가. 혹여나 선생님이 지나가다 발견하면 정욱이 크게 곤란해 질 것이라 생각한 규민은 소리를 지르며 무리의 중앙으로 달려가 정욱을 끌어안았다.
 “야, 얘 뭐냐?” 장군의 비웃는 목소리와 오랜만에 듣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상덕의 사이렌 소리가 귓가에 들렸지만 규민은 그저 정욱을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지운과 세영의 폭소소리가 거슬렸지만, 뒤이어 들리는 차가운 정욱의 목소리만큼은 아니었다. “야, 조규민. 뭐해, 놔.”
 “좆규민, 좆밥 규민, 아빠 구하러 왔니?” 상덕의 까불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억하는 소리와 함께 멈춘 것으로 보아 장군이 그를 한 대 친 것 같았다. “눈물나는 우정이네, 고정욱. 어떻게 좀 해봐. 얘도 담배나 한대 물려볼까?”
 정욱이 무어라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규민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번에는 자신이 정욱을 구해줄 차례라는 것 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절박했고 감각이 일부 둔해져 있었던 것 같다. 순간 시야가 띵해지며 귀가 웅웅거렸다. 바닥에 쳐박힌 것 같았다.
 “야 박장군!” 정욱의 성난 목소리였다. 뒤이어 장군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존나 싸가지없게 부르네, 너 뭐 되냐?”
 규민이 정신을 차리고보니 세영과 상덕은 멀찌감치 떨어져 긴장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고, 규민의 입술은 찢어져 피가 나며 입 속에는 모래가 들어가있었다. 가슴께가 구겨진 모양을 보니 장군이 순식간에 규민의 멱살을 낚아채 주먹을 날린 것 같았다.
 요새 운동을 시작하고 한껏 올라있던 자신감이 일순간에 사그러들었다. 장군이 다가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몇번이고 그를 쓰러뜨려봤는데, 현실은 근접하지조차 못하다니. 정욱과 장군은 바닥에 뒤엉켜 힘을 겨루고 있었고 장군의 패거리들은 어느 한쪽을 거들지는 않은 채 망을 보고 있었다.
 규민이 몸을 일으켜 뭐라도 할 것 처럼 보이자 지운이 그를 쏘아보며 꺼지라는 눈빛을 보냈다. 규민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다 냅다 달려가 창수를 찾았다. 정욱이 장군네 패거리들에게 둘러쌓여 두들겨맞고 있다고. 창수는 화들짝 놀라 달려갔고, 그 사이 둘의 싸움은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는가보다.
 그날 이후로 장군의 패거리들은 노골적으로 규민을 다시 배척하기 시작했고, 정욱도 약간은 거리를 두는 듯 보여 규민은 마음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