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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드라마, 관계)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M)

by 구운체리 2022. 2. 7.

M.
 “후보님, 잠시 세차를 맡겨뒀는데 방금 끝났다고 하네요. 민준이 보내서 찾아오게 시켰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그래요. 바퀴에 뭐가 좀 묻었다고 하셨던가요?”
 “신경쓰실 것 없는 사소한 일이에요. 그래도 깔끔하게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니까 일정 보시는 사이에 얼른 맡겨둔건데, 이렇게 일찍 나오실 줄은 몰랐네요.”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요. 늙은 위선자들 입에서 악취나는 거짓말들이 멈추지를 않는데, 조금만 더 어울리다가는 저한테도 냄새가 옮을 것 같아서 양해 구하고 먼저 자리를 떴습니다. 바쁘다고 했는데, 이러고 서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 곤란하겠어요.”
 “만약 의원님들 중에 누가 나오는 것 같으면 제 뺨을 후려치고 욕을 하세요. 제 독단으로 후보님을 속여서 불러낸 것으로 합시다.”
 “아니 그래도 권 선생님을 제가 어떻게…”
 “제 첫번째 가르침을 기억하십니까?” 권 선생이라 불리는 노인은 갑자기 정욱의 어깨를 아플만큼 강하게 움켜쥐었다. “몰입이 어려우시다면 지금 제 행동을 기억해두시는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아… 이해했습니다. 그 손 치우시지요.” 정욱은 냅다 권 선생의 뺨을 후려쳤다. 강 의원 비서가 전화를 받으며 걸어오는 소리를 멀리서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정욱의 차가 오더니 그들 앞에 멈춰섰다.
 “뼛조각 때문에 작은 기스가 좀 나서 떼우느라고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운전석에서 막내 비서가 내려 뒷문을 열어주기 위해 다가오며 조잘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정욱과 권선생을 보고는 말끝을 흐렸다.
 “타시죠.” 평소에 권선생을 부모보다 깍듯하게 대하던 정욱의 차가운 목소리와 움츠러든 권선생의 어깨 그리고 빨갛게 부어오른 노인의 뺨을 보며 막내 비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차 문이 닫히자마자 정욱은 권선생의 얼굴을 붙잡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권선생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진정시켰다. “아직 실루엣이 비칠 수 있으니 가만히 계십시오. 영빈, 어서 여기부터 벗어나지.”
 “예.” 영빈은 기회가 오더라도 결코 정치판에 발을 담그는 일은 없으리라 다짐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아빠도 학창시절, 아니 고1때까지는 너처럼 그랬다 승준아.” 규민은 물에 젖은 휴지처럼 구겨져있는 승준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시작했다. “공부도 그저 그렇고, 남들보다 체격도 작고, 멋있는 말같은 것도 할 줄 몰랐어. 그래서 친구들이 아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하지만 이거 사진 보이니? 아버지 졸업사진이다. 이렇게 많은 친구들한테 둘러쌓여서 인생에 주인공이 되었단말이다. 자, 아버지가 어떻게 했을 것 같니?”
 “선규는 그냥 제가 싫대요. 숨 쉬는 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나가있으라는데, 제가 어떻게 해요?”
 “어허, 친구들끼리 못된 말 좀 주고받는다고 그걸 다 진짜로 받아들이면 안 돼. 아빠도 처음에는 주위 애들이 전부 다 못 되어먹어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는거야. 네가 친구들을 불편하게 했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니?”
 잠깐 눈에 빛이 돌아왔다 금새 다시 물 속에 잠기듯 온몸이 움츠러든 승준의 모습에 정미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지만, 규민이 한번 말을 시작했을때는 일단 끝까지 마치게 두는 편이 좋았다. 정미는 연애시절 수도 없이 들어 외울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승준은 아직 그럴 기회가 없었으니. 게다가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가 전교생이 이름을 연호하는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인만큼, 끝까지 듣고 나면 축 처진 아들의 학교생활에도 분명 교훈이 될 것이라 정미도 생각했다.
 “자, 아버지는 일단 그렇게 생각한 다음부터 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다. 성적도 엄청 올랐지. 운동은 또 얼마나 무섭게 했게. 졸업할 즈음에는 반에서 싸움 제일 잘하는 친구랑도 붙어볼만큼 몸이 커졌단다. 하지만 무엇보다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었어. 그래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지. 요새 테레비 나오는 그 가수 있잖니, MK. 그 친구 본명이 민구거든, 한민구. 민구도 아버지 친한 친구 중에 한명이다.”
 중간중간 여기저기로 새는 바람에 이야기는 두세시간이 넘어가고 승준은 몸이 지쳐버리니 우울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장황하게 끝이 난 이야기 속에서 마땅한 조언을 찾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우울한 기분은 사라진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미정은 위안삼았다.
 “그래 그러니까, 여보. 내일부터 승준이 웅변 학원이랑 태권도 다니기로 했어. 그렇지?” 규민은 훌륭한 아빠의 역할을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으로 아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기지개를 펴며 방으로 들어갔다.
 정미는 규민이 펼쳐둔 그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정리하며 아들도 방으로 들여보냈다. 몇번이나 펼쳐보았는지 모르겠는 그 페이지, 동흥제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며, 지금도 그때도 규민이 그다지 몸이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