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연재/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드라마, 관계)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6)

by 구운체리 2022. 2. 11.

6.
 규민이 동흥제의 주인공 후보로 거론된 이후로 동흥제에 올릴 연극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오고갔다. 당사자인 규민의 의견을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이띠금씩 정욱의 친구들이 다가와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노트에 필기하듯 받아적어 갈때면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예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욱이 규민을 따로 불러냈다. “규민아, 우리 뭐 하고 있는지 알지?” 규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너를 위한 연극을 만들고 있어. 동흥제 메인에 올릴거야. 어때, 함께해줄거지?”

 ‘나를 위한 연극.’
 규민은 정욱의 그 문구에 흠뻑 젖어있었다. 동흥동에서 18년을 지냈고 앞으로 18년 어쩌면 81년을 더 살지도 모르는 와중의 단 한번뿐일지 모르는,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동흥제에서 역할을 맡게 되는 것도 모자라 주인공? 거기에 완전히 새롭게 시도되는 연극이 오르는데 그 대상이 나라고? 규민은 곧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아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욱은 보컬 학원을 소개시켜주며 발성 연습을 해두라고 권유했다. 아직 시나리오와 캐스팅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장담할수는 없지만, 너를 위한 중요한 자리를 꼭 마련해 둘 것이라고. 연기 학원을 다닌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아직 대본도 완성되지 않은 마당에 지나친 것을 요구하지 않을테니,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 발성 습관만큼은 고쳤으면 좋겠다고. 한동안 냉전상태에 있던 정욱이 다가와 이야기했다.
 정욱이 소개시켜준 학원은 20만원에 발성 전반을 1:1로 코칭해주는 수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집안 사정을 고려했을때 아주 큰 금액은 아니지만 모아둔 용돈으로 해결하기엔 벅찬 수준이라 부모님께 이야기하고 지원을 받는 일이 필요했다. 규민은 아버지의 결정을 기다리자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 정욱이 보내준 몇 개의 대사를 하루종일 연습해보고 있었다.
 “가르쳐줘,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걸?”
 “나에겐 빛이 있어. 그 빛으로 이 별에 닿을거야. 나는 별이 될테니까, 앞으로 이 별을 볼때면 나를 떠올려줘.”
 그리고 그 꿈은 집에 돌아온 아버지의 불벼락같은 뺨따귀 한번에 박살이 나 버렸다.
 “나는 내 아들을 한낱 몸이나 파는 딴따라로 키운 기억이 없다!”
 충격을 받은 규민은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장군아, 너라면 어떻게 할 수 있잖아.”
 윤지는 어머니가 베트남계 핏줄이 섞인 반 혼혈의 유전자를 타고났고, 잘 관리된 외모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더해져 교내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여학생이었다. 그리고 당연한듯이 밴드부 보컬이자 동흥고의 대표미남인 민구의 여자친구였다. 민구는 노래하는 것과 여자친구 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윤지는 종종 장군과 친하게 지내는 현아를 비롯한 여학생 무리와 함께 어울려다니곤 했다.
 장군도 별다른 수는 없었다. 애초에 동흥제 따위를 시시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마음에 두고있는 현아와 그 단짝인 윤지가 하도 떼를 쓰니까 최소한의 관심을 유지할 따름이었다. 그저 항상 그랬듯이 민구가 장식할 줄 알았던 하이라이트가 규민에게 오롯이 넘어가게 생겼다는 사실은, 학생회 임원을 맡고있는 세영을 통해 전해들었다.
 ‘그 찌질이가?’
 처음에 장군은 얼토당토 않은 의견이라 생각해 별다른 조치없이 민구에게 노래 연습이나 열심히 하라고 말을 던지는 것이 전부였지만, 동흥제를 보름 앞두고 정신차리고 보니 규민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대본이 완성이 되어있었다. 윤지는 날이 갈수록 울상이 되어 마치 장군이 민구를 정리해고라도 한 마냥 째려보고 있었고 현아는 그런 윤지의 옆에 붙어 ‘니가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 새끼를 두들겨패서라도 주제파악을 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딱 그날부터 규민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장군은 자신의 계획이 새어나갔나, 마음 속으로만 생각한 계획을 자신도 모르는 새 누군가에게 발설했나 등등을 잠시 고민하다, 이런 식이면 결국 규민은 무대에 설 수 없겠구나. 비록 노래 실력도 그저 그렇고 연기력은 더더욱 꽝이지만 그간의 인지도라면 민구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놓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린 것은 아니고, 세영을 앞세워 기획단의 친구들에게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당장 매일 붙들고 밤새서 연습을 해도 모자란데, 학교도 안 나오는 친구를 주인공으로 세울 수는 없잖아요? 검증된 동흥고의 얼굴, 한민구 학생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욱 파의 대변인을 담당하는 주헌이 대답을 했다.
 “아직 대본 수정이 조금 더 필요해요.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를 위한 연극’의 주인공은 조규민 학생이 되어야해요. 한민구 학생이 따돌림을 당했었다고 하면, 그게 설득력이 있겠어요?”
 “그럼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이 친구를 기다리다가 연극이 망하면 책임지실건가요? 잘 돌아가던 프로그램을 갈아엎어놓고 주인공도 멋대로 뒤집어엎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다고 비난을 받으면, 우리는 너무 억울할 것 같은데.”
 “제가 책임지고 이번 주 중으로 데려올게요, 규민이.”
 회의는 결국 정욱의 최후통첩과 같은 발언으로 갈무리되었다.
 “만약에 그 말씀 못 지키시면, 책임지고 지금 자리에서 물러나실건가요?” 세영의 질문에 정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원하시면 제가 삭발이라도 할게요. 그래서 성이 풀리신다면.”

 “규민아 다시 생각해봤어?” 정욱과 규민은 피씨방에서 만났다. 달리 갈 곳이 없었고, 요금도 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받아내야하나 하고 피씨방 주인이 먼저 정욱에게 연락을 취했다. 정욱은 규민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이미부터 알고 있었다.
 “난 내가 성격이 이상해서 그동안 친구들이랑 잘 못 지낸다고 생각했어.” 정욱의 질문에 규민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알겠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날 잘못 키웠어. 아니, 아버지가 잘못된 사람이야. 어쩐지 아버지도 친구가 없는 것 같더…”
 ‘짝!’
 “넌 어떻게 네 생각만 하니?” 정욱이 냅다 규민의 뺨을 후려갈기고는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겨우 그런 이유로 부모님을 실망시켰어? 동흥제는? 고등학교가 장난이야? 우리 친구들이 장난이야? 너가 그런 식으로 도망치면, 세상 어떤 일이든 해결될수가 있어? 더 잘해보려는 노력은 해봤니?”
 규민은 아버지한테 맞은 뺨보다 훨씬 얼얼하고 골을 울리는 충격 속에 휩싸여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 곰곰히 반성해보게 되었다.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겹쳐서 혼쭐이 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일단 했다.
 정욱이 이 철없고 목적도 없는 투쟁을 지속하는 것과, 자신이 그간의 짧은 일탈의 비용을 전부 지불하는 대신 동흥제의 주인공으로 돌아와 피나는 연습을 약속하는 것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규민에게는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니 그토록 무섭게만 느껴졌던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보이며 사과를 했다.
 ‘내가 배운 것이 짧아 무식해서 너에게 못할 행동을 했다. 용서해다오.’
 규민은 마찬가지로 울며 아버지를 껴안았고 두 부자를 지켜보던 어머니도 눈물을 쏟으며 두사람을 껴안았다. 그 따뜻한 포옹 속에서 규민은 역시 정욱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는 교훈을 얻어갔다.
 그리고 동흥제의 주인공이 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주인공이 되는게 싫다고 욕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해?” 규민의 질문에 정욱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냥 해. 그럼 다 잘 될 거야. 나를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