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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드라마, 관계)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L)

by 구운체리 2022. 4. 30.

L.
 MK는 데뷔 3년차에 제법 팬층이 두터운 싱어송라이터로 자리를 잡았다. 잘생긴 외모에 부드러운 유머감각을 지녔지만 검소한 생활태도와 수더분한 성격 덕분에 불쾌한 가십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다. 일을 가려서 받았고 누구나 꿈꿔볼법한 대형 기획사의 제안과 예능 출연 등을 숱하게 거절해 온 덕에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대신으로 얻은 그의 두터운 팬덤은 그가 느닷없이 신도림역에서 스트립쇼를 한다고 해도 기꺼이 곁에 남아 응원해 줄 높은 충성도를 지녔다.
 MK가 고정욱 의원이 속한 정당에서 내민 조그만 제안을 거절했고, 그로 인해 미운털이 박혀 방송 출연이 뜸해졌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어차피 소극장 콘서트와 음반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MK 본인도 팬들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뒷소문의 역효과를 의식한 것인지 혹은 그저 잠깐의 휴지기였던 것 뿐인지, 어느 순간 방송 섭외 요청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치와는 관계없이 최근 트렌드에 맞추어 인간 본연의 깊은 이야기들을 조명하는 조그마한 예능들이었다.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MK는 그 중 일부 채널들에 출연했고, 무엇보다 베일에 쌓여있던 그의 연애 이야기가 조명을 받았다. 그는 일관되게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첫사랑이 있었고, 어른이 되어 맞은 결별 이후로는 음악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각종 짓궂은 질문들과 유도신문에도 불구하고 MK는 고결한 순정남의 이미지를 지켜냈다.
 MK의 음악은 연애와 사랑보다는 자유와 절망 그리고 이따금씩 폭발하는 순수한 광기를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에 팬들은 역시 크게 감탄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네가 게이여도 고자여도 좋으니 건강 신경쓰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줘라’ 라는게 팬클럽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러니 민구의 여자친구였던 윤지의 이야기를 캐내고 가십거리 삼은 건 어긋난 팬심에서의 질투와는 무관한 일일 것이다. 민구와 윤지의 관계를 모르는 동흥고 동창은 없을 것이고, 개중에 가수가 된 민구의 팬은 아니지만 가십거리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라, 그 중 누가 먼저 잡음을 만들어냈는지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윤지는 일반인이었고 민구가 공식적으로 데뷔를 하고 유명세를 얻기 전, 민구가 군대에 들어가있을 때 헤어졌다. 윤지는 개성적으로 돋보이는 미모를 가졌지만 누군가의 악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것을 뽐내며 활용하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철없는 개인이 지어낸 재수없는 이야기의 등장인물로 엮일 정도로 눈에 띄었던 것이 그녀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이다.
 MK가 정욱의 별 것 아닌 제안을 거절한 배경에, 그리고 민구가 윤지와 헤어진 배경에 정욱이 삼각관계로 얽혀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극단적 성향의 유튜버들은 입에 담기 험한 추악한 소문들을 마구 떠들고 다니며, 그 증거로 윤지 본인의 증언과 인터뷰를 확보했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열어보면 대개 조잡하게 합성한 가짜 자료들 뿐이었다.
 뜻밖의 스캔들에 대해 MK는 음악으로 응답하겠노라는 대답만을 고수했고, 정욱은 왜곡된 사실에 대해선 엄정하게 공격적인 태도를 유지하되 유명가수 MK와의 친분이 뜻밖에 조명된 것에 대한 반가움을 표현하며 자신의 인지도와 이미지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여론에 대응했다.
 윤지의 친구들 중 아직까지 연락이 닿는 친구는 현아 밖에 없었다. 현아가 아직 윤지와 연락을 한다는 사실은 장군조차 몰랐다. 윤지의 이야기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전에는 무신경했고, 후로는 현아마저도 연락이 되지 않아 굳이 알릴 일이 없었다.
 “고정욱 저 씨발 놈이 윤지한테 뭔가 했을거야.”
 장군이 무심코 뱉은 말을 현아도 무심하게 들어넘겼다. 장군은 모든 말과 상상을 동원하여 정욱을 흉보는 일에 진심이었다. 그 중 대부분이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놀랍긴 했지만 모든 것이 진실은 아니었다.
 “임신시키고 낙태라도 시켰나, 못된 자식 저거.”
 “그랬으면 고씨 출마하기 전에 정리해뒀겠지 말 안 나오게.”
 “넌 뭐 아는거 없어? 진짜로 그럴 수 있어, 윤지 조심하라 그래. 뭐 연락이 되어야지 근데, 어라 이미 뭐 어떻게 손 써버린거 아니냐?”
 “얼마 전에 만났을 때 까지는 잘 살아있더라. 천윤지 사는게 힘들대, 돈이 안 모여서.”
 “아 그러냐. 허구헌 날 바쁘다더니 언제 또 만났대. 아무튼 씨발놈이야 저거는.”
 현아가 윤지를 마지막으로 본 지 일년이 넘었지만, 나이먹고 일년에 한 번이라도 보는 친구면 자주 보는 편에 속했다. 가십거리가 된 이후로는 주소를 옮기고 번호도 바꾸었는지라 먼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는데, 윤지에겐 현아가 자주 보는 친구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런걸로 하나하나 섭섭해하기엔 고된 삶이었다.

 이따금씩 길고양이들이 따뜻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찾아 시동이 걸려있는 차의 바퀴 아래에 몸을 누이는 경우가 있다. 영빈은 백미러를 통해 무언가가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본 것 같았는데,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격양된 표정의 정욱과 권선생이 차에 올라탔다.
 “저 잠시, 바퀴 아래에 고양이가 있는 것 같습니…”
 “출발하세요.”
 영빈은 정욱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 잠시 망설였다. 때아닌 스캔들 때문에 정욱과 전략팀 모두가 날카로워져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바퀴 밑에는 고양이가 있는데.
 “저, 길고양…”
 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빈은 순간 자신이 뺨을 맞았다고 생각해 얼어붙었지만, 맞은 쪽은 정욱이었다. 권선생은 무표정하게 오른손의 검은 장갑을 벗었고, 눈이 마주치자 정욱은 고함을 쳤다.
 “출발하라니까!”
 영빈은 넋이 나간 채 엑셀을 밟았다. 아니나다를까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살짝 덜컹거리는 촉감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브레이크를 밟자 바퀴자국을 따라 검붉은 페인트 같은 것이 늘어진 것이 보였다.
 “뭡니까, 대체!”
 정욱의 호통이 방금 일어난 사고에 대한 것인지 브레이크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영빈은 우선 엑셀을 밟아야했다.
 “고양이…를 친 것 같습니다.”
 “고양이가 어디 있었다는거야!”
 ‘정신이 나갔군…’ 영빈은 조용히 운전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 젊은 양반이 스트레스에 못 이겨 드디어 미쳤구나.
 “그래요, 제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까?”
 “모르고 계시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하네요. 계속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방식이 마음에…”
 “일이 잘못되면 목숨으로 갚으신다고요, 이해했으니 반복하지 마세요 권 선생님. 영빈, 고함쳐서 미안해요. 그런데 아까 고양이가 있었다고 했나요?”
 “아… 그게…”
 “제가 의원님 뒤따라 타면서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영빈, 이따 의원님 내려드리고 간단히 세차라도 하고 오지.”
 “예, 권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