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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드라마, 관계)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7)

by 구운체리 2022. 5. 2.

7.
 정욱이 어떤 마법을 부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모든 일이 술술 해결되었다. 장군은 예전보다 더 정욱을 싫어하고 있었고 민구와 그의 친구들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채 숨기지 못했지만, 규민은 주인공이 되었다. 담임인 창수는 억지스러울 정도로 규민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었고, 장군은 공개적으로 규민이 주인공을 맡는 것을 지지했다.
 장군과 패거리가 규민에게 호의를 보였다는 것은 아니다. 예전처럼 괴롭히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아도 너를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기색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장군은 규민을 지지했다. 어느 날 민구와 규민을 한 자리에 불러 타협안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둘을 정욱에게 데려가 타협안을 통보했다.
 “가장 하이라이트 장면에는 노래가 들어가고, 이 둘이 듀엣으로 부른다. 대본 니가 직접 쓰냐? 뭐 됐고, 알아서 맞춰서 바꿔놔. 내가 연기랑 노래 가르쳐놓는다. 얘네 둘도 동의했어, 거절하면 내가 무슨 깽판칠지 몰라.”
 정욱은 떨떠름하게 바라봤지만 강하게 거절할 이유를 찾지는 못한 듯 했다.
 “음… 그럼 가해자 역할을 주헌이가 아니라 민구가 해야 될 것 같은데… 지금 일주일 남았고…”
 “어차피 이새끼 그동안 연습째서 처음부터 해야되잖아. 오늘 수업 끝날때까지 니가 대본만 고쳐두면 되는거아냐? 너 수업 안 듣는거 아니까 개소리 할 생각말고.”
 정욱은 민구를 쳐다봤지만 민구는 상황자체가 피곤해 죽겠다는 기색이었다.
 “내 노래만 할 수 있으면 난 다른 건 상관없어.”
 “각본 명단에 네 이름을 올려주기를 원하니 혹시?”
 “그딴 건 관심없어. 대답이나 해, 할거야 말거야?”
 “네가 그렇게나 규민이를 위해서 나서준다니 고맙네. 나도 힘써야지 그럼. 근데 너 연기도 노래도 못하는데 가르치는건 어떻게 하려고?”
 “넌 하여간 재수없는 새끼야. 난 네기 참 마음에 안 들어, 알지? 내가 아니라 내 친구들이 가르칠거야. 무료로. 그럼 합의된걸로 알고 난 간다. 좆, 방과 후에 남아.”
 장군은 규민을 새로운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저속하고 악의적인 멸칭에 가까웠지만 본명으로 무시당할때보다는 나았다. 정욱은 인상을 찡그리며 장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규민을 쳐다봤다.
 “너도 가봐. 아, 혹시 쟤네가 뭐 이상한거 요구하는 것 같으면 나한테 말하고. 쟤네랑 어울리면서 술이나 담배같은거 손대면 안된다.”
 규민은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이 시켜서 하는 거겠지만 내키지 않음에도 친구들은 규민을 가르치는데 진심이었다. 학원비로 받아온 20만원은 규민의 옷과 소품 등을 사는데 투자했다. 규민 또한 열심히 배웠다.
 민구는 노래를 가르치며 몇번 한숨을 쉬었지만, 규민이 낼 수 있는 음역대와 호흡을 체크하며 계속 노래를 다듬었고 상덕은 규민에게 소리지르는 발성과 비속어 찰지게 뱉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현아의 친구 미주는 춤을 가르쳤다. 춤을 추는 장면은 없었지만, 박자에 맞춰서 필요한 동작들을 크게크게 보여주는 습관을 들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욱은 꾸준히 들러 규민이 대사를 제대로 외우는지 점검하고, 또 발음이 자연스럽게 나오는지를 확인하면서 대사를 수정하거나 장면을 조정하거나 했다.
 방과 후로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연습은 5일 동안 이어졌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 규민과 정이 쌓여 호감을 느끼는 친구들도 생겨났고, 등떠밀려 시작한 과제처럼 생각하던 친구들도 이 모든 시간과 과정에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애정의 감각을 공유하고 애정의 대상의 일부가 된 느낌을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규민은 잠겨 죽어도 좋을만큼의 행복에 빠져 허우적댔다.
 이 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며, 정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겠노라 생각했다.

 과정이 그저 순탄했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중요한 소품이 연습 과정에서 박살나는 바람에 조악하게 급조한 것으로 대체해야했고, 짧은 액션 연기를 준비했는데 핵심 동작을 맡은 친구가 발목을 삐었다. 규민은 꾸준히 크고 작은 대사 NG를 냈고 상덕은 성공률이 낮은 애드리브를 꾸준하게 시도했다.
 무엇보다 규민과 민구의 듀엣에서 규민을 돋보이게 하고 싶어하는 기획총괄 정욱의 욕심과 민구의 음악적 에고가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규민이 한번에 내는데 번번히 실패하는 고음 부분을 민구는 믿고 맡기지 못했고, 결국 본인이 돋보이는 편곡을 하게 되었는데 연극의 주제의식을 반영하려면 마지막 후렴은 규민이 혼자 소화해내어야 했다. 민구의 음색이 워낙 독특해 적당한 립싱크로 얼버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욱과 민구는 마지막 리허설까지 옥신각신했다. 하지만 뭐에 홀린 듯이 규민이 벌떡 일어났다. 극 중의 극에서의 한 장면처럼 근거없는 자신감이 솟아 평소의 규민이라면 절대하지 않았을 일을 하게 만들었다. 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규민이 맡네마네 싸우는 소절을 대뜸 불러버린 것이다.
 “난 이제 날 수 있어-\_”
 규민은 한치의 오차없이 고음 부분을 소화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마지막 음이 플랫되었지만, 최고음을 제대로 냈으니 그 정도는 봐줄만하지 않나 생각했다.
 “나, 이 노래 부를 수 있어 얘들아.”
 정욱은 ‘봤지?’라는 표정으로 민구를 쳐다봤고 민구는 놀란 표정으로 규민을 쳐다봤다.
 “그래, 그게 흉성이야 규민. 조금 더 자신있게 호흡 가져가면 끝음처리까지 잘 될거야.”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마법같은 활기가 돌았다. 연극을 전부 망치더라도 그저 무척 즐거울 거라는 확신이 모두에게 스쳐지나간 것이다. 정욱만을 제외하고. 정욱은 그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침착함을 유지했다. 잠시간의 소란이 가라앉고 정욱은 능수능란하게 현장을 지휘했다. 격려의 말과 동네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책임감을 일깨우는 말 그리고 기합을 돋우는 말과 함께, 너덜너덜해진 행사 체크리스트를 돌돌 말아 하늘로 치켜들면서, 동흥인의 축제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성황리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