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장편 연재/연우씨의 재판 vol 1. 본심 (드라마, 판타지)

연우씨의 재판 1부 - (9)

by 구운체리 2022. 7. 6.

9.
장내에 방송이 나오자 연우씨는 제 발로 당당하게 햇살을 향해 걸어나갔다. 두번째 교수대를 찾은 그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것처럼 행동했다. 매일 아침 해오던 운동인것마냥. 그런 그의 의연함이 사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억지스러운 자기 세뇌로부터 오고있다는 것을 소리는 알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서사를 불어넣고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기록관이 유출한 어제의 대화 내용들 위에 살을 입혀서. 기록관이 거기까지 계산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던져 현 총통의 정부를 향해 살을 쏘아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 정부에 대항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시민단체들과 야당의 인물들이 그녀를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할 것이다.
현 총통이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방향성을 제시하며 국정이 정신없이 돌아갈 때라면 어림도 없는 시도였겠지만, 지금은 그 생명력이 한계에 달한 시점이었다. 문화국의 차석이나 되는 사람이 해리가 사는 동네에서 라면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고, 오규남의 멍청한 행동들이 걸러지지 않고 종횡무진 그녀의 앞을 휘젓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 그 증거였고, 연우씨의 형 집행이 이 따위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무엇보다 현 총통의 나이가 아흔으로, 그가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들이 꾸준하게 지적되어오고 있었다.
연우씨가 제 손으로 밧줄을 들어 목에 거는 동안 현장에 관람을 온 관객들은 부지런히 연우씨를 향해 야유를 보내고 있었는데 소리가 잠시 줄어든 틈을 타 한 젊은 여자가 그를 풀어주라고 외쳤다. 
장내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가 핏대높여 야유에 앞장서던 노인이 그곳을 가르키며 '발장교의 앞잡이년이다, 체포해서 때려죽여라'고 소리질렀다. 질세라 뒤따라서 고함을 치기 직전에 여자를 두둔하는 또다른 외침이 들렸다. 곧이어 장내에는 편이 갈려서 서로 소리를 지르며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교수대가 있는지라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노인은 세상이 무너졌다며 바닥에 주저앉아 실신할 기세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연우씨는 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지 의아해하며 소리를 돌아봤다. 지랄들을 하는구나 하며 그 촌극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리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심층 집행은 급속 집행과 절차가 달랐고, 그 안내를 맡는 것이 보조집행관의 역할이었다.
관객들이 사형수를 향해 온갖 감정을 쏟아붓는 것이 따지자면 형 집행의 1부 행사였고, 그 다음은 사형수의 고해가 이어질 차례였다. 물론 보통은 고해문을 미리 작성할 시간을 주고 내용에 대한 첨삭과 검증, 교정까지 마쳐두는 것이 관례이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대신하여 고해문을 읊는 것이 또한 보조집행관의 일이었다.
소리가 연우씨의 옆에 서자 법무국의 수석관료가 마이크를 쥐고 정숙할 것을 요구했고 노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세를 고쳐앉고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리는 연우씨에게 지금 어떤 일이 돌아가는지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뱉는 모든 문장과 동작들이 생방송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소리는 연우씨의 등에 가만히 손을 얹는 것 외에는 그를 안심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다. 연우씨는 떨고 있었다.
"나 김연우는..."
소리는 가장 정석적인 방식으로 연우씨의 죄를 대신하여 고백하였고,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이 죄를 씻고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노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고해의 순서를 마쳤다. 그런 소리를 노인의 반대편에 서있던 관객들은 죽일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고해의 직후에는 관객들의 사형수에 대한 두번째 감정배출의 시간이 있는데 이때는 사전에 허락받은 소지품들을 던지는 행동이 가능했다. 개중 일부는 의도적으로 소리를 겨누고 물건들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소리는 서너개의 날달걀에 머리를 맞고 엉망이 되었지만 미동도 하지않고 꼿꼿이 서있었다.
연우씨가 의젓하게 버티는데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는데, 옆을 바라보니 연우씨는 두 손으로 온 몸을 감싼 채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규남이 그런 연우씨를 도로 일으켜 세우려 다가오는 모습이 보여 소리는 발로 그를 툭툭 걷어찼다.
"엄마 잘못했어요, 엄마 잘못했어요..."
연우씨가 중얼거리며 눈이 풀렸기에 소리는 그를 양팔로 끌어안아 일으켜세웠다. 규남은 곤봉을 꼭 쥐고 뒤에서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가 날아오는 물병에 머리를 맞고 나직히 욕설을 내뱉었다.
"때리지 마세요, 연희 떄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소리는 날아드는 물건들 속에서 연우씨가 어릴 적의 트라우마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침 날아오는 물건들이 멎었다. 가져온 물건 그 이상으로 던질 수는 없으니까.
다음 순서는 형 집행이었다. 소리는 연우씨를 중앙으로 데려가 머리를 둘러싸고 있던 헬맷을 벗겼다. 연우씨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소리는 헬멧에 걸쳐진 밧줄을 풀고 그의 맨 목에 다시 걸어 보다 고리가 좁아지도록 조였다. 관객석에서는 비명을 지르며 우는 소리가 간간히 섞여들렸다.
분명 일주일 전에 예약을 신청해서 온 사람들인데, 오늘 아침에 올라온 진위여부도 불분명한 글 몇 줄에 저토록 드라마틱하게 입장을 바꾸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 소리는 궁금해졌다. 물론 그 글이 사실임을 소리는 알았고, 비탄하는 이들의 마음에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연우씨는 자비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연우씨를 위한 자리는 저곳에 없었다.
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꺼졌다. 낙폭을 결정하는 줄의 길이가 짧아 연우씨는 곧장 목뼈가 부러지는 자비를 누리지 못한 채 꽤 오랜 시간 사지를 비틀며 몸부림쳤다. 소리는 단에서 내려가지 않고 그런 연우씨의 눈을 끝까지 마주보려했다. 소리의 깨문 입술에 피가 흥건히 맺혔다.
연우씨와 끝까지 함께해주겠다는 마음이라고 스스로를 속였지만, 실은 그렇게게라도 스스로에게 자학의 벌을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연우씨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이날 이후의 법관들은 두말할 여지없이 가장 질기고 독한 네잎을 딴 사례로 연우씨의 케이스를 꼽았다. 이 사건의 직접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네잎'에 대한 농담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문화 자체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취급받으며 많이 사그러들게 되었다. 곧이어 벌어진 정권교체와는 무관하게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진보와 맞물린 문화적 흐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