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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연우씨의 재판 vol 1. 본심 (드라마, 판타지)

연우씨의 재판 1부 - (10) 完

by 구운체리 2022. 7. 9.

10.
총통이 죽었다. 자연사였다.

총통의 죽음이 체제의 혼란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총통 개인이 가진 권력의 크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지만, 오랜 시간 다듬어진 시스템이 그의 부재를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공식적인 외교의 자리에서 한번 졸도한 이후로는 위기관리 특별국이 총통의 승인 하에 신설되어 수많은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지나가던 길고양이를 총통의 자리에 앉혀놔도 당분간은 나라가 기능할 수 있도록 공을 들여 설계해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심함은 현 정부의 특임 관료들이 체제가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주는 동안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지, 자신들의 황금기를 억지로 연장하거나 혹은 불가능한 영생의 권익을 추구하기 위함은 아니었기에 정권의 교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현 정부 내의 인사들이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지키기 위해 경쟁자가 될만한 같은 진영 내의 싹을 기회가 될때마다 쳐냈기 때문에 예정하고 있던 수순이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선택을 한 것이다. 달리 말해 지금 즈음 수명이 다했을 때의 탈출 메뉴얼도 당선의 시점부터 세워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새롭게 정권을 차지한 이들이라고 내부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전에 협의된 바에 따라 형식적인 쿠데타가 일어났고 기존 정부의 특임 관료들은 최소한의 짐을 꾸려 뒷문으로 청사를 떠났고 새로운 내각의 특임 관료들은 정문으로 들어와 청사를 점령했다. 이번에 뒷문으로 걸어나간 이들은 대부분 30년 전 정문으로 걸어들어온 구국의 개척자들이었다. 이번에 정문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선배들과 같은 퇴장을 기대했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허공을 향해 몇십발의 총탄이 발사되었지만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새로운 관료들은 계산할 것들이 많았다. 구세대의 구태를 청산하는데 힘을 낭비할 낭만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총통은 자신의 직함을 '위원장'으로 바꾸어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민중과 소통하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그의 이름과 직함을 직접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역사책에 '은사월총통'으로 기록될 것이 '은사월위원장총통'으로 기록되는 식으로 잉크낭비를 하는데에 그쳤다.
새로운 정부가 내건, 이전과 가장 차별되는 슬로건은 민중들의 참여기회 증진과 계몽을 통한 계급 간 불평등의 완화였다. 관련하여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던 시민단체들의 주요 인사들이 특임 관료의 일부 직책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하류층을 끌어올리는 것 만큼이나 상류층의 권리를 빼앗아 오는 일도 중요했다.
제도를 손보아 효과를 보려면 세월을 편으로 두어야했지만, 세월을 한 줌 낚아내는 사이에 대중은 한 바가지가 멀어졌으니 제도에 기대서는 마진이 남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헤게모니를 쥐었을 때 강제적인 집행력을 강화하여 행사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사상적인 시작점을 중앙권력의 분산으로 잡은만큼 이전 정부 이상으로 실력 행사를 하기는 어려운 사정이었다.
결국 새로운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전략은 서사의 차별화였다. 이전 정부가 악으로 상정한 서사들 중 색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들을 가져다 비틀어 선악의 반전을 꾀할 수 있으면 좋았다. 그 피해의 대상이 이미 죽어 없어져 보상을 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면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정도의 최선이었다. 
특히 이전 정부의 말년에 잡음이 일었던 연우씨의 케이스는 최고의 재료였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보안국과 법무국의 인사는 특임관료를 제외하면 거의 바뀌지 않는다. 가장 빈번하게 향정신성 약물이 투약되는 부서들인만큼 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한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일을 계속해서 할 뿐이라면 새로운 인력을 교육시키는 것보다 기존의 인력을 적응시키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오규남 검사는 다섯 번의 시도 끝에 판관이 될 수 있었고, 정소리 판사는 연우씨의 집행이 끝나자마자 사직서를 내고 하얀 약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해리는 연우씨의 사형 장면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아침에 어떤 멍청이들이 배포한 취조록은 읽어봤지만 개의치않았다. 검은 약에 잠식된 사람들이 엮인 대화는 숙고할 가치가 없었다. 광신도들이 갑자기 연우씨를 새 시대의 아이콘으로 점 찍었다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자신의 딸 정희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력한 악당은 분명하게 하나였고, 정희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악당을 꺾고 넘어서야했다.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한 정희를 대신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해리는 종종 생각해봤다. 숙명의 악당을 마주했을때 언제 가장 절망스러울까. 그 악당이 십수년간 힘을 길러온 내가 닿지도 못할만큼 여전히 막강할 때? 혹은 수십년은 커녕 일년까지도 필요없었겠다 생각할만큼 하찮을때? 그 악당이 아무런 기억이 없이 순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때? 아니면 알고보니 악당이 악당이 아니었을때?
되도록 1번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화면에 비친 연우씨의 모습은 1번과 가장 거리가 멀었고 차라리 2번인 것이 제일 좋았다. 이따금씩 비친 눈빛이 3번과 같아 화가 났지만 그날의 분위기와 옆에 비치는 소리의 표정을 보면 4번일수도 있겠다는 상상력이 피어오르곤 했다. 그래서는 안됐다.
연우씨의 숨이 끊어진 것이 확실해지고 나서야 해리는 정희를 방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다. 정희는 연우씨의 몸에서 생명이 떠나간 모습을 끝내 직접 두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 소식을 여러번 확인해서 듣고 난 뒤로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해리는 그제서야 어제 오늘 사이에 동생으로부터 걸려온 수백통의 부재중 전화에 다시 대답을 해도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