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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연우씨의 재판 vol 1. 본심 (드라마, 판타지)

연우씨의 재판 1부 - (8)

by 구운체리 2022. 7. 3.

8.
소리는 연우씨에게 다시 한 번 교수형 급속집행의 확정을 선고했다.

연우씨의 재심의 검사석에는 원래 예정되었던 오규남이 아닌 배인혁이 특별히 고용한 검사가 앉았다. 배인혁의 사람이 변호인석이 아닌 검사석에 앉아있다는 사실은 지난 4주 간의 특별 조사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 아무 쓸모없이 버려질 것임을 의미했다. 배인혁은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연우씨를 쏘아보고 있었다.
소리가 의례적인 선고문을 다 읽어갈때쯤 배인혁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법정 전체를 쏘아보더니 가장 먼저 일어나 법정을 떠났다. 그의 큰 덩치 때문에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부산스러웠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가면서 신음소리들을 유발했기 때문에 소리는 폐회의 문장을 읽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시키지 않았으면 자원이라도 하려했지만,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연우씨의 두번째 사형의 보고집행관으로 소리가 배정되었다. 동료들은 같은 네 잎을 두 번 따는 최초의 사례라며 약을 올렸고, 누군가는 저번에 제대로 못 땄으니 횟수는 한 번으로 세어야 한다는 농을 거들었다. 소리는  그런 인간들 사무실에 불이라도 질러버리고 싶었지만 진화 시스템이 잘 되어있어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상상으로만 그쳤다.

다음 날 형장에는 연우씨 혼자 주황색 옷을 입고 부들거리며 서있었다. 연우씨는 다른 저승길 동료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서있느라 소리가 어깨를 두들길때도 곧장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곤이 서있던 자리에는 규남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곤봉을 든 채 서 있었다. 소리를 발견한 규남은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당신, 내가 내 손으로 끝장내준다고 했던거 기억하지?"
"그랬었나? 너무 작아서 못 들었나봐. 너 그때 내 침대에서 뒹굴 때 봤는데, 자지도 되게 작더라. 한창때도 발기가 잘 안 되는거니, 아니면 타고난게 기형인거니? 수정이는 비위도 좋더라."
"이 씨발년이 진짜!"
지지않고 받아친 소리의 도발에 넘어간 규남이 욱하고 다가와 곤봉을 치켜들자 연우씨가 두꺼운 옷으로 뒤덮인 둔한 움직임으로 그의 목덜미를 때렸다. 규남이 곤봉을 놓치고 켁켁대며 뒷걸음질치다 넘어졌다. 나자빠진 그의 뒷모습이 중계되고있는 카메라의 사각을 벗어나 화면에 잡히자 사람들은 사형식이 시작된 줄 알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가지가지한다."
"정숙해주세요. 제가 죽으러가는데 방해가 되잖아요."
연우씨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분명했다. 이것도 밤새 연습했을까.
"카메라에 잡히니까 조용히 일어나서 이리로 와. 오 검사, 다른 죄수들 어딨어, 어떻게 된거야?"
"오늘 다른 놈들은 없어. 저새끼는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매달릴거야. 그러게 감히 차석님이 내민 손을 뿌리쳐? 쥐뿔도 없는 새끼가 건방지게 말이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멋대로 할거면 재판은 왜 해! 내가 판사야, 어제 내린 판결이 말도 없이 뒤집혀?"
소리는 규남의 멱살을 잡고 밀어붙였다. 슬금슬금 밀려난 규남의 뒷모습이 다시 카메라의 화각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려다 무언가 이상한 모양새를 보고는 수군대기 시작했다.
"총통님 지시야. 차석님이 직접 건의해서 승인받아온거야. 그래봐야 목매달아서 따버리는건 똑같은데 뭘 그렇게 성질을 내? 지금 넌 네 걱정을 해야될때야. 취조과정에서 저새끼한테 빨간 약 먹였다고 자백했다며? 넌 좆됐어 정소리. 기록관이 자기 한 몸 희생해서 다 까발렸다고."
"뭐? 전부 다?"
"그래, 이제 상황 파악이 되냐? 그리고 나도 조금 있으면 판사로 승진한다, 더 이상 너보다 아랫사람 아니니까 이 손 치워!"
소리는 규남을 놔주었다. 규남은 몇걸음 더 비틀거리다 완전히 카메라에 담겨버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조명에 맨손으로 얼굴에 그늘을 씌우며 뒤돌아보는 어리둥절한 그의 표정이 전국의 화면에 송출되고 있었다. 소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런 병신같은 새끼, 누가 좆된건지 파악을 못하네. 그런데도 사형을 미루는게 아니라 심층집행으로 매다는거를 총통이 직접 싸인까지 했어? 다들 지난 밤에 미치광이 버섯으로 파티라도 한거야 뭐야."
소리는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미치광이 버섯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리의 어깨에 두툼한 손이 얹어졌다.
"괜찮아요 판사님. 심호흡하면서 일어나요. 자, 하나 둘."
소리는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연우씨, 나 지금 갑자기 연우씨가 부럽다. 이 미친 세상에 어떻게 살아야되니 도대체?"
규남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된 것 처럼 제대로 카메라를 찾아 멋진 자세를 취하려는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럴듯한 포즈를 연출하려 했지만 곧이어 인이어를 타고 질책이 이어졌다. 규남은 복도로 돌아와 곤봉을 쥐고 연우씨를 향해 휘두르려 했지만 소리가 다시 한 번 그를 제압했다.
"까불지 좀 마. 너한테 어울리는 일을 해라,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양반이 너한테 안전관리를 맡겼니. 연우씨가 곤봉으로 날 두들겨 패기라도 할 줄 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