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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연우씨의 재판 vol 1. 본심 (드라마, 판타지)

연우씨의 재판 1부 - (5)

by 구운체리 2022. 6. 26.

5.
3주차부터는 정소리 판사와 연우씨의 독대가 가능했다. 정소리 판사가 연우씨에게 사형 확정을 선고한 당일 진행된 면담 이후로는 처음으로 갖는 독대의 자리였다. 범죄자가 로비를 시도하거나 판사가 개인적인 연민을 갖게 됨으로 정당하지 못한 판결을 내릴 것을 대비해 둘은 제도적으로 만날 수 없게 되어있었는데, 특심의 과정에 있어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수뇌부의 판단으로 되살린 것이므로 많은 제약들이 사라져 연우씨는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가 될 수 있었다. 보다 넓은 자유를 주었을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려는 의도 또한 내포되어 있었다.
“도저히 기억이 안 나요 연우씨?”
소리는 연우를 정중하게 대했다.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보다는 잘 설득해서 다시 교수대-급속집행을 받을 수 있도록 전략을 짜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의 형 집행이 멈추어진 이유부터 알아야했다.
“박사일론, 고규민, 임치록, 멜리스, 배인혁, 염현승”
이 명단은 연우씨와 수감생활 동안 접점이 있던 모든 고위관료들의 이름이었다. 집행정지의 권한이 있는 인물들 중 거의 절반이 들어갔고, 소리는 개중에 이익관계자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느닷없이 케케묵은 서사의 재조명을 시도할 이유는 없었다. 소리 개인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정소리 판사의 입지를 흔들기 위해 이런 해프닝을 벌일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상대가 고위 관료라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번거로운 쇼 대신 직간접적으로 해코지를 할 방법은 많았다. 고위 관료를 구워삶은 그녀의 경쟁자 누구라면 더더욱 이런 눈에 띄는 쇼를 할 이유가 없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를 더욱 골치아프게 만드는 건 몇 주 전 그녀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얕은 수작질이었다. 애초에 일개 약이나 나르는 잡부가 그녀의 업무량을 안다는 듯 언급할때부터 경계심을 품어야 했던걸까. 물론 별 뜻 없이 대꾸한 것일수도 있었겠지만.
하지만 그 잡부가 하필 세 알의 검은 약을 가져오고 폐기용 약품이 들어있어야 할 통에 식염수를 담아온 것이 우연일 수 없었다. 그녀가 검은 약을 빼돌리려 했다는 정황을 조작하기 위한 얕은 시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간계를 꾸밀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역시 먼저 생각난 사람은 오규남 검사였다. 그는 법관시절부터 꾸준히 그녀를 견제하고 무시하려 노력했으며 그녀가 승진을 한 이후로는 트집거리를 잡지못해 안달이었다. 아마 연수원 시절 그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고 당시의 사칙을 어긴 채 동료 원생과 숙소 내에서 잠자리를 가진 것을 그녀가 고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본인의 자존심과 커리어가 박살이 났다고 뒤에서는 그녀의 흉을 보고 앞에서는 침을 뱉는 등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지만 소리는 조금도 미안하거나 거슬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의 침대에서 룸메이트와 그 파트너가 격렬한 섹스를 하고 베개에까지 그 흔적을 남겨놓는다면 가만히 웃어넘기지 않았을테니까.
오규남 검사는 연우씨의 최초재판에서 그녀를 조롱한 그 검사이기도 했다.
오 검사의 부모는 정치 쪽에서 잔뼈가 굵은 실세였던 적이 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연수원에서 크게 망신을 당할 뻔한 것을 무마하느라 가지고있던 평판의 대부분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소리의 침대 위에서 있었던 해프닝은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에 대한 뒤따른 고발들이 이어지게끔 한 신호탄이기는 했지만, 경중으로 따지자면 귀여운 축에 속했다.
소리는 어째서 규남이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좆같을 뿐.
특히 규남이 함부로 건드렸던 임윤서의 부친이 문화국의 수석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규남이 그녀를 엿먹이려 한 계획의 일부로 연우씨의 재판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검은 알약의 건이 연우씨의 사건과 별개의 일이라면 그 배후에는 규남이 있을수도 있었다.
검은 약을 빼돌리는 일은 최대 사형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범죄로 다루어졌지만, 법관들에게 있어 실행의 난이도가 높은 범죄는 아니었다. 배달과 검수가 직급이 낮은 보안국 잡부들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놓고 꼼수를 부려도 제지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물론 신고해서 걸리면 곤란해지겠지만.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두고 기회가 될 때 법관들을 쳐낼 명분을 수집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소리는 머리통이 찢어진 청년에게 검은 약을 먹여 증거를 인멸했다. 그녀가 삼키기엔 부담이 되었고 신고를 하자니 이 관료가 매수된 계획의 일부라면 되려 의심을 살 확률이 높았다. 현 법무국 내에 그녀에게 친밀한 사람은 없다시피하고, 진실과 정의보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와 볼거리를 만들어내는데 보다 진심인, 오히려 문화예능국의 이름에 걸맞은 부처였기 때문에 소리는 현 법치의 체계를 신뢰하지 않았다.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그 부조리를 개혁하겠다는 막연한 꿈을 품던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매너리즘에 찌든 직장인으로 살 수 밖에 없겠노라 타협을 마친 소리였다.

검은 약을 강제로 먹은 청년은 얼마 뒤 관청 화장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빈민가 출신의 일개 잡부의 죽음에는 서사성이 부족했으므로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업무 중 사고로 인한 순직으로 대충 처리되었다.

연우씨의 재판을 현장에서 지켜본 사람은 그때 교도소에서 본 뚱보 배인혁과 법무국 차석 박사일론 둘 뿐이었다. 물론 개인 집무실에서 중계되는 화면을 시청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가능성을 열어둬서는 무언가를 알 수도 할 수도 없었다.
법무국의 수석과 차석은 업무상 그 자리에 있었다지만 문화국 차석이 그 자리에 왜 있었는가. 소리는 그런 의미에서 배인혁에 대해 연우씨에게 물었지만 에리식톤같은 식탐으로 연우씨 뿐 아니라 모든 재소자들의 먹을 것을 탐하며 골치를 썩혔고, 연우씨를 비롯한 사형수들을 라면 끓이는 노예로 부려먹었다는 것 외의 특이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 그 돼지새끼가 밥처먹을때 말고는 어디서 뭘해도 이상하고 어디서 뭘해도 이상하지 않지.’
그렇게 생각하며 셋째 주가 아무런 진척없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