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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연우씨의 재판 vol 1. 본심 (드라마, 판타지)

연우씨의 재판 1부 - (4)

by 구운체리 2022. 6. 25.

4.
특심에는 4주의 기간이 주어졌다.

이번 특심은 특히 예외적이었다. 집행이 확정된 형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은 관료체계의 수뇌부 중에서도 특임으로 구성된 최고위 관료에게만 있었다. 즉 현 총통 또는 그가 직접 임명한 각 공무 부처의 수석 및 차석 관료 중의 한 명이 형을 중지시켰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행 직전에 멈추는 일은 전무했으므로, 아마 그 자리에 참석해 관람을 하던 누군가 연우씨를 알아보고 그 자리에서 집행 중지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특심 동안에는 소리가 진행했던 재판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연우씨가 출생한 순간부터 현 시점까지의 모든 유의미한 순간들이 검토되었다. 3년의 집행확정 조사기간보다도 훨씬 많은 인력들이 투입되어 심층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소리가 3년 전에 요구했다가 모두의 눈밖에 난 바로 그 일이 이제서야 진행되고 있었다.
첫주 동안 조사관들은 연우씨의 부친에게 아동성범죄의 이력이 있으며 외도를 일삼는 등 가정 내에서 보호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아내어 보고했다. 정소리 판사가 높은 가능성을 지적했지만 망상으로 치부되었던 가설들이 대부분 사실과 일치했음이 조사과정에서 어렵지않게 드러났지만, 여론은 오히려 당시 재판에 연루되었던 조사관과 법관들 모두의 업무 태만에 대한 비판의 방향으로 형성이 되었다.
다음 한주 동안은 연우씨에 대한 최초재판과 재조사 및 확정재판의 논지에 대한 검토가 이어졌다. 정소리 판사는 워낙 치밀하고 꼼꼼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심리와 판결문에 대한 재검토 지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연우씨의 사형 판결을 뒤집는데에 도움이 되는 주차는 아니었다.
그동안 소리의 법관 생활에 비추어볼때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연우씨의 부친은 거리에 불을 지르다 사살되었고 모친은 연우씨에게 살해당했다.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금전 및 명예의 이득은 전무했다. 어느 정권이라고 다르겠냐마는 이번 총통의 모든 결정은 철저하게 이득이 되는 계산에 근거하고 있었다. 연우씨를 되살림으로써 모종의 반전 서사를 만들어 써먹으려는 것이리라.
다만 그게 무엇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소리는 최초재판에서 연우씨에게 망설임없이 사형을 선고하려 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없는사람과 다름없이 취급하는 조사관들의 불성실함과 검사 측의 오만함을 묵시할수가 없었다.
검은 알약을 꾸준히 복용한 소리는 순간의 충동이 진정된 후라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내리지 않는다. 조사관들은 일제히 백지를 제출했으며 검사는 구형서류의 귀퉁이에 동그란 밧줄과 화살표를 낙서로 그려넣었다.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 얼핏 보면 성적인 농담으로 보일수도 있는 중의적인 그림이었다.
젊은 나이에 당파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중앙권력의 지원도 없이 동료들보다 빠른 속도로 승진을 한 그녀에게 던지는 야유이며 도전이었다. 첫 단추에서 그녀의 스탠스를 정하라는 메세지였다. 순종할 것인지, 온 세상을 상대로 덤벼볼 것인지. 그리고 소리는 굽히고 멈춰서기에는 너무도 젊고 강했다.
소리는 언니인 해리를 사랑했고 해리는 정희를 친딸 이상으로 아끼며 보살폈다. 소리는 비록 해리 외의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는 정희와 깊은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친조카처럼 아꼈다. 그래서 연우씨에게 최대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직접 선고하는 날이 오기만을 처음 법관이 되던 순간부터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쥐고 싶었던 것은 정의의 칼자루이지 광기의 칼자루가 아니었다. 절차적 정당성이 없이 내키는대로 목숨을 빼앗아올 거였다면 번거롭게 국가권력에 빌붙지 않고 진작 직접 처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법관 시절 모의 스터디를 핑계삼아 연우씨가 수감되어있는 교도소를 종종 오가며 그의 생활을 엿보아왔던 것이다.
당시 홀로 구석에 편안히 앉아 라면을 끓여먹는 모습을 보고는 분통이 터져 누군가 그 상을 뒤엎어주기 바랬는데, 마침 근처에 있던 뚱보가 냄비를 빼앗아 머리에 부어버리더니 자기 것을 만들어오라고 역정을 내는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을 품기도 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뚱보가 현 문화국의 차석관료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정치 사범의 이름으로 갇혀있는 인간들이 정권이 바뀐 뒤에 고위 관료가 되는 일이 빈번했기에 선배들은 교도소 내부에서 만나는 재소자들에게 되도록 친절할 것을 당부하곤 했다. 정치 사범들은 특히나 성질이 지랄맞은 경우들이 많았다.

소리는 유예를 선고했고 3년 간의 재조사 과정을 보고받으며 어쩌면 아홉 살의 연우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을 재고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연우씨 본인이 자신에 대한 항변의 의사가 없었다.
끔찍한 일을 겪고 남겨진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인해 사회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이 망가져있으며, 그의 이야기가 온갖 꾸밈을 달고 온 세상에 소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 그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줄 곳이 없었다. 교도소 내에서도 그는 스스로를 방어할 힘도 명분도 없었으므로 모두에게 만만한 폭력성과 도덕적 우월감의 쓰레기통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연우씨가 살아숨쉬는 모든 날들이 그 본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모두가 원하는대로 빠르게 매듭이 지어지는 편이 좋았다.

그래서 정소리 판사는 피고 김연우의 사형을 교수대-급속집행의 방식으로 확정하여 선고했다. 형은 익일 오전 열시에 진행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