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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연우씨의 재판 vol 1. 본심 (드라마, 판타지)

연우씨의 재판 1부 - (1)

by 구운체리 2022. 6. 18.

1.
“연우씨, 제 얼굴 봐요. 이거 이렇게 덮어놓으면 눈앞이 보이나, 연우씨, 들려요?”
주황색 두건을 뒤집어 쓴 젊은 청년의 숨소리가 무겁다.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미세하게 부들거리는 몸의 진동이 연우라고 불린 청년이 느끼고 있는 긴장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 모습은 온 세상에 방송되고 있었다. 보조 집행관의 역할을 맡은 정소리 판사는 연우씨가 자신의 몫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었다.

연우씨에게 위안이 되는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똑같이 주황색 옷을 입은 동료들이 이미 앞에 네명이 갔고, 뒤에는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보조집행관이, 왼쪽에는 근육과 곤봉으로 무장한 안전담당관 곤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두번째 남자를 곤이 오른손으로 들어올리고 왼손으로 꼬집어 형장에 보내는 모습을 본 뒤로는 모두들 바짝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소리 판사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들을 다독였다.
그녀는 오늘의 열명 중 넷에게 최초의 사형판결을 내렸고, 둘에게 집행확정의 판결을 내렸다. 요즘처럼 사형수가 넘쳐나고 법관이 부족한 때가 아니라면 그녀 정도 짬이 찬 사람이 집행에 직접 관여할 일이 잘 없겠지만, 그렇다고 사람 목숨을 거두는 일을 일자무식한 잡부들에게 나누어 지게 하는 것도 도의적으로 마땅하지는 않았기에, 알려진 바 정소리 판사는 오늘의 노동에 자원했다.
법관이 직장 생활 중에 자신이 언도한 사형수의 집행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심심치않게 일어나며,
그들 사이에서는 ‘네잎을 딴다’는 은어로 불렀다. 법관들은 네잎을 몇 개나 땄는지를 세며 술자리에서 자신의 불운을 과시하곤 했다.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통용되고 있다.
‘적어도 같은 모양의 네잎을 두 번 따지는 않는다.’

죄질이 대단히 중하지 않은 사형수들은 열명이 모이면 급속 집행을 통해 한번에 처리한다. 고해와 속죄의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에 한명당 오분 이내로 집행이 행해지며, 그러다보니 집행관도 사형수도 공장의 부품처럼 움직이며 서로 간의 감정적인 갈등을 확인할 여유가 없다. 서로에게 인도적인 방식인 셈이었다. 급속으로 딴 네잎은 네잎으로 치지 않는다는 자조섞인 비아냥도 종종 오갔다.
오분의 시간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빴다. 알려진 바 집행관들은 사형수가 자신들을 미워할 때보다 사랑하려 들 때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자신들이 태어난 무의 형태로 돌아가는 문턱에서 그들을 보살펴주는 권위적인 어른을 마치 부모와 대응되는 개념으로 전사시켜 아이처럼 사랑하는 사형수들이 종종 있었다. 그럼으로 눈앞에 닥친 죽음의 공포를 담담히 마주하는데 도움이 되는 듯 했다.
연우씨도 그랬다. 
“숨 쉬어요 숨, 연우씨 자 하나, 둘. 천천히, 자 하나 둘.”
“하… 흠…”
다행히 연우씨는 고분고분히 지시를 따랐다. 주황색 두건을 벗기면 공포에 질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드러날수도 있었지만 대충 덮어놓은 거적데기 아래서 연우씨가 할 수 있는 건 입에 물린 재갈 사이의 숨구멍으로 최대한 남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 뿐이었다.
“자, 이제 땅 소리 들리면 연우씨 목에 내가 밧줄을 걸 거에요. 그리고 속으로 백까지 세고 기다려. 몇 까지 센다고?”
“하… 흠… 네 판사님. 근데, 앞이… 잘.. 안 보여요.”
“거기! 마스크 제대로 안 맞춰? 빨리 체크해! 연우씨, 심호흡. 따라해 흡! 그리고 하아아. 괜찮아 잘 될 거야. 우리 연습 했잖아. 자, 우리 몇까지 센다고 했죠?”
띵, 하는 신호음이 들리고 연우씨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목에 걸렸던 밧줄이 팽팽해지며 녹슨 그네가 울어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지켜보는 관객들의 환호성 비슷한 것이 먹먹하게 들렸지만 연우씨에겐 모든 것이 그저 소음이었다. 의연하게 차례를 맞겠다고 판사님과 약속했지만 상상 속에서 자라난 공포가 이제는 통제를 벗어났다. 약간 뒤틀린 마스크로 무척 불편해진 시야와 차오르는 습기, 그리고 눈앞에서 들리는 소음은 연우씨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곤의 걸음소리가 들렸다.
연우씨는 두려움에 떨며 흐느꼈다. 지켜보는 관객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야유를 던지고 있었다.
“아직 시간 좀 있잖아!”
정소리 판사는 신경질적으로 곤을 멈춰세우고 연우씨를 스스로 일으켜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사형수를 감싸는 행위라며 더 큰 야유를 보내는 관객들도 있었다.
“연우씨, 숫자. 숫자 세기로 했잖아, 하나 다음이 뭐야 연우씨.”
“둘… 셋…”
연우씨는 마음을 다잡고 숫자를 읊었다. 숫자에 집중하는 동안 다른 집념이 사라질 수 있다고 정소리 판사가 가르쳐주었다.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도 않았을텐데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연우씨는 전지한 정소리 판사의 손을 꼭 붙들며 자신있게 숫자를 세어나갔다.
스무발자국을 걸어가자 두툼한 손이 왼쪽 어깨를 꽉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잠시 움찔하며 멈춰선 연우씨의 목에 둥근 밧줄이 신속하게 둘러졌다. 제한된 시야와 두꺼운 옷 때문에 긴가민가 했지만, 정소리 판사가 넥타이를 고쳐주듯 밧줄을 손봐줄때에는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신호주면 두 발을 땅에서 떼요. 그래야 더 빨리끝나. 숫자 계속 세다가, 꾹 하면 점프. 기억하지, 연우씨. 띵소리나기 직전에 내가 누를거야. 숫자 계속 세고. 잘하고 있어.”
“오십… 스물다섯…”
“빨간 약. 아까 연우씨 먹은 물에 빨간 약 내가 몰래 탔어. 연우씨 지금 괜찮아. 자 기운내자, 할 수 있지. 연우씨, 의젓하다 연우씨.”
연우씨가 제대로 숫자를 셌다면 팔십정도 되었을 즈음, 연우씨의 띵 소리가 들릴 때까지 십초정도 남았을 즈음. 연우씨는 돌연 의연함을 되찾았고, 바보같은 숫자세기를 멈추었다. 그는 충분히 단단해졌다.
“우리 연희를 부탁해요.”
연우씨는 땅에서 튀어오를 준비를 끝마쳤다. 소리가 씌워주는 굴레를 둘러메고 하늘을 바라본채 그를 향해 야유를 쏟아붓는 광장으로 다섯발자국 더 나아갔다. 소리는 그의 등 뒤에 다가와 가만히 손을 대고 있었다. 삼초 정도의 시간이 남았음을 감지했고, 총집행관이 띵 소리를 내는 구슬을 밀어내기 직전 신경을 긁는 듯한 현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약속대로 정소리 판사는 그의 등을 살짝 밀어주었고 연우씨는 깡총 뛰어올랐다.
그리고 띵소리와 함께 연우씨는 무릎으로 바닥을 찍었다. 땅이 꺼지지 않았다. 연우씨는 아픈 줄도 모르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특별 재심사 요청의 건으로, 2165번의 형 집행을 보류한다”
갑자기 흘러나온 안내 방송에 관람객들의 야유가 쏟아졌으나, 고장난 부품을 치우듯 연우씨는 산채로 치워졌고 나머지 다섯 명은 잠시 품었던 일말의 희망이 무색하게 예정대로의 운명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