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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연우씨의 재판 vol 1. 본심 (드라마, 판타지)

연우씨의 재판 1부 - (3)

by 구운체리 2022. 6. 22.

3.
소리의 방으로 세 알의 검은 약이 배달되었다. 

보안국 소속의 하급 관료가 은색 트레이 위에 디저트처럼 접시에 담아 서류와 함께 방까지 가져왔다. 앙증맞은 리본이 달린 반구형 덮개가 씌여진 모양이 온갖 장식에 환장하는 현 수뇌부의 악취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들은 교수대에 사용하는 밧줄에도 나비넥타이를 달고 싶어했으나 시민단체와 야당의 반발로 무산된 바가 있다.
“뭔데 세 알이나 가져왔어? 나보고 일만하다 뒈지라는거야?”
“요즘 일이 바쁘시…”
소리는 나이어린 보안국 관료에게 쏘아붙이면서 그 중 두 알을 집어 물과 함께 삼켰다. 관료는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 입술을 꿈틀댔지만 소리가 손가락을 들어 입 다물고 있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법관들은 대개 속이 시꺼멓고 성깔이 드러우며 잘못 걸리면 없는 죄도 만들어 감옥에 쳐박는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고위급 관료가 아닌 한 그들은 인간적으로 기피해야 마땅했다. 그런 편견에 찬 괴담들 중 열에 일곱 이상은 사실이기도 했다.
소리는 검은 약 특유의 더부룩한 불쾌감이 위장에 도착해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보안국 관료가 뒷걸음질을 치자 소리는 그를 쏘아보며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남은 약 한 알을 식초 통에 담아 폐기하고 서명을 해야했다.
검은 약은 복용감이 불쾌해서 매주 한 알 씩 먹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법관들이 있는가하면, 두 알을 한번에 삼켰을때 느껴지는 각성상태에 중독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보다 많은 검은 약을 보다 자주 처방받기 위해 일에 중독되어 있었다. 간증에 따르면 다안의 거인 아르고스가 몸 속에서 깨어나 숨겨져있던 눈들이 뜨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고 했다.
소리에게는 달에 한 번 꼴로 두 알이 배달되었다. 해리는 통계적 극단치를 언급하며 기겁을 했지만, 민감한 쪽의 극단이 있다면 둔감한 쪽으로도 극단이 있는 법이었다. 소리는 중독증세나 지나친 소화불량 등의 부작용을 겪지는 않았다. 다만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고 심장을 비롯한 장기들이 과하게 열심히 일을 하며 극한의 각성상태가 장시간 지속되는 탓에 남은 수명이 줄고 있다는 확신이 들 뿐이었다. 노년의 시간을 끌어다 젊은 나이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좋지 않은가 싶었기에 소리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소리에게도 세 알이 한 번에 배달된 적은 처음이었다. 내란 모의가 발각되었다거나 수뇌부가 교체되는 등의 시기에 법관들의 업무가 과중해질때나 최상위 법관들에게 서너알이 처방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왜? 
연우씨의 특심 재판을 소리가 담당하게 되었다지만, 재조사의 건은 조사관의 일이었다. 일부 법관들이 재판 대상이 됨에 따라 평소보다 조금 많은 양의 일이 배정되었다지만 이만큼의 각성이 필요해보이지는 않았다.

소리는 한 알을 쟁반 위에 놓인 납으로 된 작고 둥근 통에 담가 뚜껑을 닫고 흔들었다. 양각으로 새겨진 호랑이 문양이 불쾌한 복용감을 느끼기라도 하는마냥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소리는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야, 보안국.” 소리는 서명을 받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도망치려는 관료를 불러세웠다. “너 몸 좋아보인다? 몇 살?”
“규정 상 대답드릴 수…”
“까불고 있네, 이새끼가 판사 앞에서 규정을 들먹여?” 소리는 신경질적으로 사무실을 돌아다니다 손에 집히는 스노글로브를 집어던졌다. 해리가 정희를 데리고 다녀온 여행지에서 기념품으로 사다준 글로브였는데, 두 팔을 벌린 산타가 짓고있는 웃는 표정이 묘하게 야릇하다며 깔깔 웃던 기억이 있는, 나름 아끼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검은 약의 효과가 올라오는 소리에게는 극도의 신경질과 짜증 외의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스노글로브는 관료의 귓볼을 스치고 지나가 벽에 부딪히며 박살이 났고 바닥에 거꾸로 떨어지면서 산타의 목이 반쯤 꺾였다. 흠칫 놀란 관료가 쟁반을 놓치며 유리잔이 깨지고 바닥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청소하는 인부를 제가…”
소리는 허둥대는 잡부에게 바짝 다가가 슬쩍 한쪽 다리를 그의 몸에 밀착시켰다. 젊은 청년의 몸이 뻣뻣해지고 귀가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할까 젊은 친구. 너 어디 소속이야?”
“저… 보안국…” 그러자 소리는 대뜸 뺨을 후려갈겼다.
“보안국 사람이 묻는 말에 대답하게 돼있나? 여기가 법정이야? 재판 받으러 왔어?”
황당한 표정으로 울먹이는 청년을 보며 소리는 어느 정도 분이 가라앉았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유리조각들과 목이 부러진 산타가 짓고있는 야릇한 표정이 기괴하게 느껴져 재빠르게 이성이 돌아왔다. 검은 약을 두 알 이상 먹으면 종종 충동적으로 바보같은 짓을 하곤 하는데, 그 직후에 찾아오는 후회감과 허망함 때문에 소리는 검은 약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동료들처럼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장기적인 부작용을 겪지는 않았으니 비교적 직무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노라 생각했다.
“가봐. 청소하는 분 오시라고하고.”
청년을 밀쳐내고 몸을 수그려 스노글로브를 집던 소리는 호랑이 무늬가 새겨진 납통의 뚜껑이 열려 그 사이에 담궈둔 검은 약이 굴러나온 것을 보았다.
“어이, 잠깐.”
물에 젖은 서류와 쟁반을 챙겨 나가려던 청년은 반쯤 짜증섞인 표정으로 소리를 쳐다봤지만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센 충격에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소리가 납통으로 정수리를 깨부실 기세로 후드려 찍은 것이다.
“너, 오검사가 보낸 사람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