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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연우씨의 재판 vol 1. 본심 (드라마, 판타지)

연우씨의 재판 1부 - (2)

by 구운체리 2022. 6. 19.

2.
연우씨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다. 아니 있었다.
연우씨는 그녀를 연희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더이상 그 이름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새로 받은 이름인 정희로 십칠년을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꾸준히 복용해 온 하얀 알약 때문에 어릴 적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다섯살 때의 사건 하나가 있었다. 그녀의 오빠가 홀로 오누이를 키워준 어머니를 느리고 잔혹하게 살해했던 것. 무딘 가위로 두눈을 포함해 일곱 군데에 자상을 냈으며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 애원하는 어미를 뒤로하고 미친 짐승처럼 온 집안을 헤집어놓다 부엌칼을 들고 돌아와 다시 스무번의 칼질을 통해 끝을 내버린 사건.
오빠가 일부터 이십까지 세는 것을 똑똑히 듣고있던 탓에 정희는 그 숫자를 정확하게 기억했고, 시체에 나있는 자상의 개수와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에 정희의 증언은 연우씨에게 사형이 선고되는 명확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겨우 아홉살의 연우씨에게 증거를 인멸할 범죄지능은 없었으니 결과가 다르진 않았겠지만.
정희는 숫자를 세는 것에 대해 강박적인 불안증세를 보였고 이따금씩 티비에 연우씨의 얼굴이 나올때면 비명을 지르며 발작증세를 보였다. 그녀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몸이 견딜 수 있는 최고치의 하얀 약을 꾸준히 복용해왔지만, 약의 효과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흐릿해지는 속도에 가속도를 붙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강렬한 기억의 조각들은 오히려 또렷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연우씨는 십년을 소년교도소에서 보냈다. 그 사이 정희는 몇몇 보호시설을 거쳐 일반 학교에서의 적응을 시도해봤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녀의 비극적인 배경을 숨긴다고 숨겨도 어떻게든 소문은 흘러나갔다. 잔인하리만치 철이 없는 아이들은 그녀를 놀림감으로 삼았고 되먹지 못한 어른들은 더러운 피가 묻은 것처럼 정희를 기피대상으로 삼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열에 한둘 정도였지만 트라우마와 불안장애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아가려는 정희의 삶을 번번히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빈도였다. 정의를 행한답시고 그녀의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한 이십대가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못된 시선들은 숨어들뿐 사라지지 않았다. 한번 온라인에 올라간 정보는 무슨 수를 써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통계관으로 나랏일을 하던 해리씨가 정희를 위탁하여 양육과 교육 일체를 담당하게 되었다. 미혼 여성에게 아동을 위탁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자원하는 이가 유일했으며 동생이 법관이고 부모가 전문직에 종사했던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 모두가 꺼려하는 일을 자처한 속내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본인들이 떠맡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다들 그저 알음알음 귀추를 주목할 따름이었다.
해리씨의 동생인 정소리 법관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판사 직을 맡게 되자 일각에서는 그것보라며 역시 뒷거래가 있었다, 저들에게 사형을 내려라, 등등 소음이 났지만 중론이 되지는 않았다. 연우씨는 스무살이 되던 해 재심에서 다시금 사형을 선고받고 성인 교도소로 이송되었는데, 삼년 간의 조사기간이 끝난 뒤의 집행확정재판이 정소리 법관이 판사로서 맡은 첫 재판이 되었다.

깨끗한 병원에서 하루에 한 명이 태어날 때 뒷골목에서 스무 명이 태어나는 기형적 비례구조를 억지로 조정하려는 듯 하루에 선고되는 사형은 백여 건이 넘었고, 무분별한 집행과 특히 정치 보복을 위한 사법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 확정재판이라는 완충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값비싼 변호인단을 준비하면 유예 판정을 받을 수 있었기에, 돈이 있으면 최소한 무기수로 버티며 연명할 수 있었고 재심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비용이 늘어났기에 법관들은 돈 벌기가 참 좋은 세상이었다.
연우씨의 경우 가진 돈도 없을뿐더러 여론의 동정을 사고 있지도 못했으므로 조사기간동안 그의 변호를 맡은 법관들은 구색만을 갖추었고, 정소리 판사는 첫 업무로 난이도도 낮고 서사성도 좋은 케이스를 맡게 된 셈이었다.
사형수의 서사는 국가의 공포 정치를 위해 관리되고 사용되었으므로, 가장 큰 피해자인 정희를 보호하고 있는 해리의 여동생이 적법한 절차를 통해 보복함으로써 보상한다는 서사는 고위 관료들에게 꽤나 달콤했다. 정소리 판사가 연우씨를 만난 건 결코 우연일 수 없었다.
그러나 정소리 판사는 조사관들의 업무태만을 근거삼아 ‘유예’판결을 내렸다. 그 후로 정소리 판사는 온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 그녀를 의심하던 사람들은 그녀가 유착관계를 숨기기 위해 어리석은 판결을 내렸다 소리쳤고, 지지하던 사람들은 수습기간동안의 모의 법정에서 연우씨의 서사를 접하며 모종의 망상성 감정 전이가 있었으리라 넘겨짚었다. 관료들은 자신들이 계획한 완벽한 시나리오를 어줍잖은 힘에 취해 망친 그녀를 고깝게 봤다.
연우씨의 죽음이 자신을 자유케하리라 기대해 온 정희는 고통의 시간이 3년이 늘어났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조카의 피눈물을 그동안 그렇게 봐놓고도 절차적인 정의가 그렇게나 중요했니?” 해리는 소리와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비탄섞인 울음으로 물었고, 소리는 “타인의 피로 내 눈물을 닦을 수는 없어. 그게 가해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야.”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소리의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다면 인연을 끊는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을수도 있었다.
“다섯 살짜리 동생 보는 앞에서 **자기 엄마를 찢어죽였어**. 그걸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살려둘수가 있어?”
“아홉 살짜리가 칼로 사람을 찢어놨으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나 알아보는게 법관이 할 일이고 대답할 기회를 받는게 피고의 권리야. 그 권리를 보장해주는게 내 일이고.”
“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그 사람은 그냥 미친 짐승으로 태어난거야. 세상 사람 다 아는거를 너 잘난척하려고 모른체 하겠다는거야?”
“말 조심해 언니. 연희도 그 사람 딸이잖아. 언니도 그냥 연우씨가 그냥 가해자였으면 좋겠지? 그게 편하니까.”
“검은 약을 많이 먹으면 사람이 이렇게도 되는구나. 다시보지 말자 우리.”

검은 약은 하얀 약과 정확히 반대되는 약효를 가지고 있다. 검은 약은 과다복용 시 도덕관념이 흐려지고 인간성을 상실하는 등의 되돌릴 수 없는 부작용이 우려되므로 제조와 처방, 복용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법관들에게는 직무적 효율을 위해 주기적으로 일정량의 검은 약이 허락되며, 개인 재량에 따라 거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임의로 증량하거나 빼돌리는 것은 금지되어있다.
해리가 아는 한 소리는 검은 약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전부 받아먹었다. 안전한 양을 계산하여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임상결과에 따른 추정치일 뿐, 통계관인 해리는 예외 사례의 위험성을 소리에게 꾸준하게 경고해왔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버린 괴물들이 얼마나 무섭고 해로운 존재인지 미디어를 통해 접해왔기 때문에, 해리는 정희를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 소리와의 연을 끊어야한다고 확신했다. 3년이 지나고 소리가 연우씨에게 사형집행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을때도 확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약이라도 올리는 듯 그 집행이 목전에서 무산되자 정희는 방에 도로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고 해리의 동생에 대한 혐오는 살의에 가깝게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