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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래빗 헌팅 (일상)

래빗 헌팅 - (8), 끝

by 구운체리 2023. 4. 15.

8)
토끼 사냥 메뉴얼
1. 제자리에서 총으로 겨눈다. 인간은 출발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2. 토끼들이 인간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개를 풀어 쫓는다. 개는 정해진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3. 개들은 훈련받은 동선대로 돌아오고, 영역 밖에는 덫을 두어 잡는다. 토끼는 경기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4. 살아남은 토끼들이 있다면 먹이를 주고 번식을 시켜 새끼를 깐 뒤 성체는 손님들에게 애완용으로 판매한다. 
5. 총에 맞거나 개에게 물린 토끼들은 태우거나 짐승 먹이로 주고, 덫에 걸린 토끼들은 가죽은 손질하여 팔고 고기는 인간들이 먹는다. 파티에 고기가 부족할 시 4의 일부를 데려다 추가로 삶을 수 있다.

Rabbit Hunting, 평행우주
1. 기환: 동전이 공장장의 손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기환은 벌떡 일어나 동전을 낚아챈다. 여기까지는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아귀에서 동전이 구부러지는 듯한 착각이 느껴질 정도로 그러쥔 주먹으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공장장의 목울대를 후려치려고 주먹을 뻗는다. 그 찰나 용식이 잽싸게 골프채를 뽑아들어 기환의 머리통을 내려친다. 마지막에 힘이 빠진 주먹은 궤도를 빗나가 공장장의 앞니를 흔들리게 하는데 그친다. 용식은 기환의 머리통을 몇차례 더 내려치고, 축 늘어진 기환은 이내 들이닥친 장정들의 손에 이끌려 끌려나간다. 늘어진 기환의 손에서 동전이 바닥에 떨어진다. 실제로 구부러진 동전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본 공장장은 흔들리는 이빨을 끼워넣으려는 듯 만지작대면서 말한다.
“저건 이제 앞면도 뒷면도 아니야. 종만이 새끼는 잘라버리고 저건 아주 병신을 만들어서 어디 내다버려.”
2. 승수: 왼손을 머리맡으로 뻗은 여자는 익숙한 서랍을 보지도 않고 더듬어 콘돔을 꺼냈다. 얌전히 팬티를 벗은 승수는 여자의 리드에 첫경험을 맡겼다. 인생 최고의 3분이 지난 뒤 몽롱해진 승수는 아쉬운 마음에 한번 더 해달라고 조르고 여자는 추가금액을 요구했다. 제대로 금액을 듣지도 않고 승수는 돈은 어떻게든 마련하겠노라 호언장담을 하며 몇차례 서비스를 더 받았다.
당연히 낼 돈이 없는 승수에게 영수증을 내밀기 위해 덩치좋은 형님들이 찾아왔고 되도않는 너스레를 떨다가 배를 몇대 맞았지만 기환이에게 맞았던 것에 비하면 맞을만 하다고 생각을 했다. 승수는 기열이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꾸었고 기열이는 욕을 하면서도 돈을 부쳐주고 승수를 꺼내주었다. 하지만 승수는 공무원 월급을 타기 시작할때까지도 돈을 갚기는커녕, 그 맛을 못 잊어서 더더욱 큰 돈을 빚지면서까지 같은 여자의 VIP 고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재수없게 감사에 걸려 품행부적격으로 경질당했다. 기열이도 더이상 어떻게 승수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해 겨울 이후로 아무도 승수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3. 우선: 기열이가 제때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한 우선은 듣도보도못한 업체에서 이천만원을 빌렸고, 그것들도 전부 잃었다. 남은 것이라곤 그럴싸한 얼굴과 몸뚱아리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얼굴과 몸뚱아리가 제법 값어치가 나가고, 아나운서와 방송인을 준비하면서 다듬어둔 잡기들이 제법 도움이 되더라는 것이다. 다소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호스트는 제법 적성에 맞았고 어느 새 빚을 다 갚고도 꽤나 큰 돈을 수중에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전직 호스트가 선택할 수 있는 진로는 많지 않았다. 계속 늘어만가던 씀씀이와 반비례하게 우선의 화려함은 저물고 있었다. 선수로 대성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장에 뛰어든 것도 있다. 하지만 우선은 마담의 재능도 뛰어났다. 한때 가장 친한 친구였던 기열, 기환, 승수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꼬셔서 고객으로 붙들어 둘 수 있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선수로 뛰던 시절보다도 더욱 성공한 어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 사십이 되던 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마약류의 오남용이었는데, 의도인지 실수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고 밝혀낼 방법도 없었다.
4. 기열: 기열은 잘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오디션에 도전해 연극배우가 되었다. 수입이 1/10에 가까이 줄었고 일에 쏟는 시간은 더욱 늘어 삶은 고되지만 더는 우울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한동안은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밥을 사주며 기열의 꿈을 응원했다.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면 주변 사람들을 데려와 객석을 채워주었고 때론 부끄러울 정도로 호응을 해주었는데 같이 연기하는 동료들은 그런 기열을 부러워했다.
시간이 지나 중년이 되었을 때 기열의 연기력이 때 아닌 주목을 받아 스타덤에 오르는 기적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 가정을 꾸린 친구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어려워져 각종 잡일들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이따금씩 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우울함과 방황대신 고단함과 푸념들로 채워진 삶 또한 고통이기는 했다.
그렇게 보편적인 고통 속에서 평범하게 나이먹다 가족하나 꾸리지않고 일흔이 갓 넘은 나이에 사망한 기열의 장례식에는 극단의 후배들이 꽤나 많이 찾아와주었다. 변변히 차려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기꺼이 육개장 한 숟갈에 소주 일잔, 그리고 고인과의 추억 한점씩을 씹어삼키며 오래오래 식사를 마치고 갔다.
기열의 삶은 연극 대본이 되어 후배들의 무대에 올랐지만 그 연극 또한 몇차례 지나고 난 뒤로는 어디에도 기억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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