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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리뷰

(리뷰) 애프터 양

by 구운체리 2023. 3. 31.

삶의 요체란 무엇인가.

안드로이드의 존재론을 다룬 작품들 중 가장 섬세하고 사려깊다.
나의 언어를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를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포용이다. 포용은 우리가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라는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시혜성이 아니라, 비로소 우리 개개인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고찰하게 하는데 그 효용이 있다.
잘 우려낸 차 한잔을 음미하면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란 단순히 그 맛에 국한되지 않는다. 차라는 것은 제법 복잡하다. 모태가 된 식물이 있고, 그 식물이 뿌리를 두었던 땅이 있다. 그런가하면 식물 종 본연의 특성은 별개이다. 나무가 자라고 잎을 고르고 말려서 가공하는 모든 과정의 분기점으로부터 수십만가지 서로 다른 차 한잔의 결과가 나온다.
차를 음미한다는 것은 따뜻한 물에 용해된 찻잎의 화학 성분들을 인간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삶을 음미한다는 것은 생의 자취를 따라 흩뿌려진 기억들을 감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공하여 해석해보는 행위일 것이다.
잘 살아낸 하나의 삶을 탐구하면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란 단순히 그 가치나 재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이란 역시 제법 복잡하다. 생물학적 뿌리가 있고, 나고자란 물리적 정서적 뿌리가 있다. 인종에 따른 문화적 특성은 별개로 있다. 심지어 같은 개체가 같은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기억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기억의 물성은 객관적이지 않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르게 쓰인다. 영화에서 어떤 기억들은 반복되는데, 그때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 ’There’s no something without nothing’이라는 두 번의 대사는 명확하게 톤의 높낮이가 다르다.
그래서 양의 기억은 가치가 있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왜 기억하는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일들은 일어난다. 그 중 어떤 것은 자연스레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그 중에 어떤 것들을 특별히 골라 기억한다. 일어난 일, 기억하는 것들, 기억하기로 한 것들은 각각 그 무게가 다르다. 그것들 사이에서 어떤 공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에는 세가지 화면비가 사용되는데, ‘양’의 소중한 기억(전체화면)을 제외한 두가지 화면비(위아래 잘림/양옆 잘림)의 구분 기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이 영화를 두 번을 봤다. 내 개인적인 해석으로 위아래를 잘라 가로가 긴 수평적 화면비는 ‘일어나는 사건’을 의미하고 반대로 수직적 화면비는 개중 ‘기억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전체화면은 물론 ‘기억하기로 한 것들’이다.
기억되는 것들이 반드시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시공간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라서, 내내 헷갈렸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머릿속에 흐린 화면으로 재생되기에 충분한 악센트를 가진 장면들이긴 했다. 그리고 역시, ‘기억되는 것들’의 명확한 필터 조건이란 불명확하다. 혹은 내가 파악을 못했거나.
그저 진부한 일상처럼 지나간 수평적 비율의 화면들 중 대부분은 양옆이 유리로 한 겹 덮여져있거나 다른 무언가(주로 식물들)로 채워져있어서, 실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좁고 날카로운 수직 비율의 화면 안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진짜’ 진솔한 감정적 이야기들은 초점의 가장자리인 측면에서 혹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전개되는 연출들이 많다.
우리는 그렇게 기억하고, 기록한다. 우리는 그렇게 기억되고, 기록된다.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나무다. 나무는 벽에 그려진 그림으로, 박물관에 박제된 모양으로, 제자리에 심어진 모양으로, 분재의 모양으로 모든 곳에 등장한다. 접붙이기 된 나무는 다양성 가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인간은 나무의 뿌리내림을 동경하더라도 식물됨을 동경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안드로이드는 인간됨을 동경하지 않는게 맞다. 그저 우리처럼 자신의 존재론을 고뇌할 뿐이다.
양의 ‘감마’ 가족에서의 존재 목적은 문화적 뿌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Chinese fun fact를 가르쳐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Asian이 되기 위한 조건이란 무엇일까. Asian은 태어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 리사이클된 양의 존재는 ‘그리움’이라는 요체를 타고났고 그것을 미카에게 전달했다.
그리움의 요체는 ‘사랑’이다. 따라서 존재론의 요체는 ‘사랑’이다. 이 진부한 명제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이 영화는 멀고 어렵지만 옳고 온전한 길을 걸었다.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