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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리뷰

(리뷰) 혼자사는 사람들

by 구운체리 2023. 4. 5.


인간은 장소에서의 환대를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된다

엄마가 어제 죽었다. 아니 한달 전이었나. 그러나 어쨌든 진아는 계속 일을 하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았다.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주어진 자신의 일을 잘한다고 해도 세상은 자꾸만 그녀의 세상을 두드린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영속가능하지 않다.
옆집 남자는 필요 이상으로 말을 걸고, 회사는 신입 교육을 맡기는데 이 신입은 또 지나치게 E형에다 F형인 인간이고, 아빠라는 작자는...
죽은 사람이 말은 왜 걸고, 얘는 대체 어떻게 콜센터에 합격을 했으며, 아빠라는 작자는 대체. 혼자만의 조용한 식사를 지향하고 서로 간의 대화를 자제하게끔 하는 미분당은 딱 좋은 식당인데 넌 왜 따라오는데.
혼자사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고 세상이 억까를 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혼자’인 부분보다 ‘사람’의 부분이 문제였던 것이다. 진아는 ‘사람’이지 못한 상태로 ‘사람’되지 못한 대우받는 일을 에이스랍시고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고 스스로도 그 결핍의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극복해내지 못한 스트레스 속에서 사람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콜센터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진아도 어쨌든 ‘사람’이었던 적이 있으니까.
엄마는 꽤 오래 아팠고, 오래 전 바람나서 가족을 버린 아빠는 몇십년만에 돌아와 말년에 잠깐 곁을 지켰답시고 엄마의 유산을 전부 가로챘다.
진아는 엄마의 죽음에 아빠가 관여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었지만 증거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유산을 떠나서라도 어디서 갑자기 돌아와 뻔뻔하게 자리를 가로채는 그 남성에게 불쾌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표현하는 순간 실체화되는 문제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겠지.
눌러담다못해 기껏 내질렀더니 못 듣는건지 그런 척을 하는건지 대화가 실패한 채 단절이 되어버렸다. 못 들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품고 또 남에게 전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책임을 묻고 허울뿐인 사과를 받아내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사람’이 되고 문제를 극복하는 힘을 갖고 바로서는 것이 먼저인 일이다.

김현경 박사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이 제법 여기저기서 인용이 되는 것을 보고, 쭉 읽어봤다. 저자는 인간이 사람이 되는 조건으로 ‘환대받음’을 제시한다. 나는 책에서의 ‘환대’를 관용적인 용례에서의 뜻으로써 환대라기보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가 나와 동등한 선험적 권리를 가졌음을 존중하는 것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콜센터 직원은 대표적으로 ‘환대’받지 못하는 대상이다. 직원과 고객의 대화 속에서 직원은 ‘사람’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림자를 필요로 하듯이 ‘사람’이 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콜센터의 인물들은 그림자를 빼앗긴 결핍된 존재들이고, 진아는 특히 그 결핍을 만성적으로 지닌 채 살아온 콜센터의 에이스이다.
환대받지 못한 자들은 도처에 있다. 진아의 옆방에서 포르노 잡지에 깔린 채 사망한 히키코모리 청년을, 어찌 환대할 도리가 없었겠지만 있었더라도 안했을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새로 이사 온 남자가 망자의 재떨이를 사용하는 것이 진아에게는 고통스러운 장면이다.
남자는 망자와도 환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라는 뜻과, 진아 본인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기에. 제사라는 것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이고를 떠나서, 망자가 되어서라도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다만 가능한 방식으로 환대를 표현할 뿐이다. 내 마음의 안녕을 위해서라는 표현도 맞겠지만, 그럼으로 내가 ‘사람’으로 살며 환대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고 표현을 할 수도 있겠다.
진아는 환대받지 못한 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 스스로도 타인을 환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옆집 남자에게 화를 내고 아빠에게 화를 내고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반응들을 곱씹으면서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진아는 아빠와의 일을 억지로 이끌어가는 대신, 끝까지 ‘사람’이고자 했던 수진씨에게 사과하는 쪽을 택했다. 환대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우리의 현대 사회는 불완전할지라도 ‘절대적 환대’의 기반 위에 세워져있다. 진아는 현대 사회로 들어오는 첫 발을 내딛었다.
진아는 ‘사람’으로 돌아올 준비가 되었다. 콜센터 일은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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