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연재/우주, 효영 - Bloody Oscar (관계, 범죄)

우주, 효영 - Bloody Oscar (1)

by 구운체리 2023. 9. 14.

1.
"효진씨! 나 물어볼거 있는데!"
"저 아니에요, 닮은 배우고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 그래...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 예민하게 반응하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피곤하긴 하겠다. 난 그냥 너무 닮아서 소름이 다 돋더라지 뭐야."
"제가 그 감독이 취향이 아니라서요. 되게 인상적인 역을 맡았나봐요? 연기경력도 뭐 없는 배우라던데."
"아유, 말해뭐해. 한국사람들 호들갑 떠는게 좀 유난이긴 하지만, 오스카? 뭐 그런 상 받는다는 얘기도 나오드만. 좋은 상인가? 아무튼 영화보는데 진짜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난. 좋은 의미로, 응응."
효진은 부쩍 늘어난 동생의 인기를 대신 실감하는 중이었다. 별 생각없이 길을 걷다보면 대뜸 멈춰서더니 갸웃거리며 다가와서는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멀찌감치서 말도 없이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는 데면데면하던 직장 동료들마저도 효진에게 말을 걸었다. 지난 이년간 매일의 평일과 가끔의 주말을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며 보냈으면서, 언제 시간이 나서 부업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생각하는걸까. 그만큼 효진과 동생이 판박이라는 말이기도 했고, 동생이 이번 영화로 얻은 세간의 주목이 엄청나다는 뜻이기도 했다.
효진은 정작 동생이 어떤 일을 했는지 잘 몰랐다. 가족들은 동생이 나온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전에도 조그만 작품 몇개를 한 것으로 알지만, 그 무엇도 보지 않았다. 이번 황주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기사가 났을때 그녀의 어머니는 혀를 찼다.
황주덕 감독의 영화에 나온 배우들은 헐벗다 못해 속살마저 갈가리 찢어진 모습으로 자극적인 모습의 연출을 위해 망가지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 영혼을 좀먹는 포르노와 인간정육 사이의 어중간한 무언가에 어째서 최고주가를 달리는 배우들이 줄을 서서 달려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배우란 날고 기어도 결국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다, 그녀 부모님이 내린 결론이었다.
효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황감독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여자의 젖꼭지와 남자의 뇌수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를 찍지 못하는 감독을 예술가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포장해주는 작금의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생이 출연하지 않았더라도, 이번에 유달리 대중과 평단 양쪽의 극찬세례를 고루 받고있는 '오계절의 유언'은 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똑 닮은 동생이 출연해 젖꼭지를 드러낸 채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게 될 위험이 있다면 더더욱.
그러니 그녀를 배우 '천우주'로 착각해 멀찌감치서 수군덕대며 눈길을 피하는 이들의 머릿 속에 어떤 장면이 그려지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같아선 어릴 적처럼 양손으로 그 아이를 꼭 붙들어 옭아맨 채 책임을 따져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배우 '천우주'는 '권효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씨 집안은 족보에 배우를 들이기 원하지 않았고, 효영은 자신의 요람과 이름을 냅다 버리고 떠날만큼 자신의 꿈을 사랑한 아이였다.
아직도 효진은 배우라는 직업이 한 사람의 인생을 거는 꿈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애초에 무엇이든 그럴만한 것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효영이 무언가를 이뤄내기는 했나보다. 아니, 배우 '천우주'가 자신의 첫걸음을 제법 요란하게 뗀 것은 확실했다. 발자국 자체에 대한 효진의 가치판단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지만, 얼굴팔린 사람들이 대가로 겪어야하는 일상의 고충을 자신이 나눠갖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문제가 이제 겨우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앞으로 자신의 삶을 덮쳐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직장 동료들이야 효진의 가족관계에 대한 신상명세를 모르니 대충 얼버무릴 수 있지만, 어려서부터 효진을 알았던 친구들에게까지 동생의 존재를 숨길 수는 없었다. 두살 터울의 효진과 효영은 초등학교 4년과 중학교 1년을 같은 곳에서 다녔다. 이차성징의 시차 덕에 발육 정도의 차이가 있던 시절을 잠깐 제외하면 효진의 절친한 친구들조차 멀리서는 둘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유명인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의 고충을 너희가 알 수는 없다라는 핑계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언제한번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무리한 요구들을 쳐내왔지만 언제까지 통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효영은 친구로 두기에 썩 괜찮은 성격이 아니라 학창시절의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려나. 어머니는 효영이 골라 사귀는 친구들이 죄 별볼일 없다며 힐난해댔지만, 효진이 보기에 효영에게는 친구가 전혀 없었다. 효영이 친구라고 주장하는 이름은 몇 댔지만, 학창시절 내내 효영이 누군가와 친밀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효영을 효진으로 착각한 효진의 친구들이 효영과 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을까. 친구들은 종종 효영을 신기해하고 귀여워했었다.
개중에도 특히 효영에게 애착을 보였던 중학교 동창 진홍에게 십년만에 연락이 왔다. 진홍이 좋아한 것은 효진이었지만, 당시 효진은 진홍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외모를 급으로 비유해보자면 효진이 김혜수일때 진홍은 유해진정도랄까. 효진은 부러 못되게 군 적은 없어도 딱잘라 선을 그어왔었다. 그래서인지 진홍은 부러 효영을 효진과 착각하곤 했었다고 효진은 생각한다. 진홍이 얼굴은 좀 그래도 애는 착해서 남 불편하게 할 행동은 안할테니 모른 척 두었는데, 그 당시 효영과 진홍이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 까지는 몰랐다.
"그대로다. 너도 효영이도."
십년이 지난 진홍은 효진이 보기에 여전히 키는 작고 못생겼지만, 피부가 눈에 띄게 좋아졌고 표정과 말투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한결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그거 효영이 아니고 내가 찍은건데."
"너 안 봤지? 영화."
"어? 며칠 전에 봤거든… 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천우주라니까?"
"영화 봤으면 그런 말 못한다 너."
"무슨 뜻이야 그게? 영화에 뭐가 나오는데? 너 효영이에 대해서 아는게 있어?"
"천우주 아니네 역시. 영화도 안봤고."
진홍에게 연락이 왔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배우 '천우주'에게까지 귀찮은 일들이 번질 것이다라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댔지만, 사실 본능적으로 변명을 찾았다는 사실 자체가 효진이 내심 품었던 속물됨의 반증이었다. 프로필 사진으로부터 대강의 견적을 마치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잡은 순간부터, 효진은 진홍을 휘어잡아볼 생각이었다.
몇번의 만남 뒤 효진은 진홍과 잤다. 효진이 어려서 만났던 몸 좋고 자존심 세지만 알맹이 비어있던 멍청이들보다 훨씬 따뜻하고 사려깊어 기대 이상으로 만족감이 좋은 상대였지만, 절정의 순간에 눈을 질끈 감으며 '죽어도 좋아'라고 중얼대는 버릇이 꼴뵈기 싫었다. 닫힌 눈꺼풀 뒤의 눈동자에 맺힌 상이 효진이 아닌 천우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건 더더욱 유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