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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우주, 효영 - Bloody Oscar (관계, 범죄)

우주, 효영 - Bloody Oscar (4)

by 구운체리 2023. 9. 21.

4.
깊게 잠든 마을, 달빛만이 낮은 건물들 사이를 비춰주고 있다. 다 찢어져가는 천조가리 하나만을 걸친 여자가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카메라는 높은 곳에서 그녀의 뒤를 쫓는다. 끝내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나체가 되었지만 여자는 오히려 더욱 시야가 트인 곳을 향해 뛰어간다. 광장에 다다라 한쪽 무릎을 찧은채 무너지며 짐승처럼 포효하는 그녀의 정면을, 앞질러간 카메라가 클로즈업해서 잡는다. 오른쪽 젖가슴에 맞아있던 초점이 점점 멀어지며 시점이 어느 건물의 창틀 뒤로 넘어간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지만 아직 연기가 나는 담배꽁초가 창틀에 걸쳐져있다.

“언니, 이제 남자친구 얘기는 그만 좀 해.”
“너무 나만 떠들었다 그치? 네 생각은 어때? 진홍이랑 좀 친했지 않았어?”
“내가 친한 사람 중에 언니가 아는 사람은 없어.”
“아 그런가. 어렸을 때 되게 이뻐했다고 들었는데. 일하면서 친해진 사람은 없니? 다들 유명한 사람일거 아냐.”
“일단… 아니다. 무의미한 대꾸는 하지말아야지.”
“요새 잘나가는 배우가 누가있더라… 아니다, 혹시 아이돌도 만나볼 수 있나?”
“나 오늘 일얘기하러 온거야. 알고 있었지?”
“재미없다. 한결같이 차갑고 매정해 넌. 너도 노력이라는 걸 좀 해봐. 언니만 어른이니?”
“낭비하지 말자, 시간이든 감정이든. 나랑 영상 하나만 찍어. 유튜브에 올리게. 오늘같은 느낌으로 대화만 하면 돼. 약간의 대본은 준비할게.”
“너 집에는 다시 들어올거야?
물어보면 대답을 좀 해. 지금 혹시 무슨 연기하려고 감정 끌어올리는 중이니? 느리고 구리다 얘.”
“으음… 일부러 숨기지는 말자. 그런데 되도록 꺼내지는 말고. 오늘 우리 하루종일 그 얘기는 한마디도 안했잖아. 주로 너 혼자 떠들었지만.”
“언니라고 해야지. 부탁하는 태도가 엉망이네 권효영.”
“내 이름은 우주야. 천우주. 주의해줬으면 좋겠는 점들도 같이 적어줄게. 당연히 공짜로 나와달라는거 아니야. 세금신청 할 수 있게 계약서도 준비할거고.”
“야, 결국 내가 동의해야 진행되는거 아니야? 친동생한테 돈 몇푼 받자고 계약서까지 쓸 일이니? 돈 좀 벌었다고 언니 지금 무시하는거야?”
“너… 언니도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을 거 아냐. 내 영화는 안봤겠지만 연예뉴스나 이런거는 보지? 내 문제도 크지만 언니 인생도 피곤해졌을거야. 해결하자고, 정공법으로.”
“내가 왜 너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되니? 아 또 올라오네. 정말 난 한평생을…”
“미안해. 진심이야. 우리가 남들 보기에 그렇게 닮았을 줄은 전혀 몰랐어. 사람들이 나한테 그렇게까지 지저분하게 질척거릴 줄도 몰랐고.”
“니가 처신을 잘 했어야지 동생아. 언니가 도와줄게. 이러니저러니해도 가족이잖아.”
“낭비하지 말자고 했어. 이러니저러니를 확실하게 해두고 가자고 부르는거야, 알아듣지?”
“너 지금 아주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같이 살아내자고 하는 일이잖아. 나한테 조금 더 도움되는 일이니까 돈으로 보태주겠다는거고. 소속사에서 제안한 일이고 언니가 거절할 이유는 없을거야. 오히려 내가 거절할 이유가 있을지 확인하려고 불렀어. 얼굴보고 얘기하는게
도움되잖아. 됐어 이제. 촬영때까지 나머지 할말들은 서면으로 주고받자.”
“효영아.”
“우주라고.”
“그래, 톱스타 천우주씨. 너무 애쓰시지 말고, 언제든지 돌아오세요. 나도 이 말 해주려고 쪼르르 달려나왔네. 집나가더니 십년만에 대뜸 연락 온 천덕꾸러기가 부르는데.”
우주는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먼저 일어나 나가던 중 멈춰서서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잠시 혀로 입천장을 쓸었다. 더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한평생 뭐? 언니가 어떤 삶을 살아왔다고 믿고 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니네 엄마한테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뭔지 기억해? 너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우리가 엄마가 둘이었나?”
“살아온 건 됐고, 살아갈 생이나 잘 살아보자 제발. 우리 영상 찍어서 올리기 전까지만이라도 조금 조심히 살아줬으면 고맙겠어, 본체후보 2번 권효진씨.”
“넌 항상 그게 문제야! 오늘도 남 얘기 안 듣고 니 할말만 하고 가잖아!”
효진이 뒤늦게 생각난 말들을 뒤돌아보며 외쳤지만 이미 우주는 자리를 떠난 뒤였다. 테이블에 우주가 두고 간 마스크와 선글라스 그리고 볼캡이 덩그라니 있었다. 효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것들을 써봤는데 크기가 딱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