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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우주, 효영 - Bloody Oscar (관계, 범죄)

우주, 효영 - Bloody Oscar (5)

by 구운체리 2023. 9. 24.

5.
우주가 등장해 인사를 하고 준비된 대본의 들임말을 어색하게 읽었다. 뒤이어 우주가 한명 더 등장하더니 자신의 친언니를 세상에 소개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우주의 언니가 우주에게 팔짱을 끼며 억지웃음을 짓자 우주가 '하던대로 하자'며 핀잔을 준다. 민망한 표정을 짓는 언니를 앉혀두고 벌떡 일어나더니 영화의 명대사가 포함된 몇 장면을 연기해보였다. 펑펑 울다가, 미친 사람처럼 꿇어앉은 채 울부짖다가,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더니 자리로 돌아가 언니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이거란다'
남은 영상 내내 우주는 준비한 말들을 뱉었고, 효진은 소품처럼 앉아서 무언가 감정표현을 하려했지만 그때마다 우주가 영화 내의 각종 장면들을 인용하는 연기를 시연하며 틀어막았다. 영화를 보지 않은 효진은 그저 어리둥절한 채 점점 기분이 상했고, 끝내는 쌍욕을 뱉었다. 우주는 한숨을 쉬더니 촬영을 끝냈다.
이 짓을 두번은 못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내보낸 것이지만, 자매의 투닥대는 영상은 의도한 것 이상의 진솔함을 인정받았다. 여론은 백래쉬를 타고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알권리'의 주인장 제프는 즉각 사과영상을 올렸지만, 그동안 올렸던 영상들을 지우지는 않았다. '천우주'의 본명을 비롯한 신상명세를 공식적으로 밝히라는 요구를 이어가는 '시민'들에게는 이제 그만하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물론 본명 '권효영'과 그녀가 다녔던 학교 등의 정보는 알음알음 퍼져나갔지만, 공공연한 비밀같은 것이 되었다. '효영'이 아닌 '우주'로 그녀를 대함으로서 그간 대중이라는 견장을 달고 행하던 도를 넘은 관음행위를 상쇄하려는 듯 했다.
효진의 삶은, 그녀가 바란다고 생각했던대로 효영의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내심 그로인해 잃게되는 것들이 아쉬울 줄 알았지만, 막상 잃은 것도 별로 없었다. 두 자매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들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효진은 천우주와 데칼코마니인 친언니의 지위를 당당하게 획득했다. 지인들 사이에서는 준연예인이 되었다.
우주에게는 뒷말받이 방패가 하나 생긴 셈 되었다. 천우주가 현실에서 사람을 죽이더라도 한번까지는 언니를 알리바이 삼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자연스럽게 효진의 부모들또한 주변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효진의 모친은 만나는 사람이 몇 없었고 둘째 딸에 대해 물어볼라치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을 피했기에 금새 관심의 대상에서 배제되었지만, 부친의 경우는 달랐다. 처음에는 딸의 유명세를 인지하지 못한 채라 진심이되 의도하지 않은 겸손을 떨었으나, 반복되는 띄워주기에 어깨가 으쓱해진 나머지 끝내는 딸바보 행세를 해버렸다. '역시나 아버지란' 하고 사람들은 제멋대로 받아들였다.
아직 한번도 '오계절의 유언'을 보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박씨가 '아무리 딸이 그렇게 고생했다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은 봐주는게 납세만큼 중요한 의무다'라고 떠들어 제끼기에 혹해버린 것까지는 괜찮았다. 술김에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상영회를 열겠노라고 선언할 때 말리는 친구가 한명도 없었던 것이, 그가 사귀어 온 인간관계 깊이의 한계라고 단정짓는 것은 너무 가혹한 판단일까.

술에 취한 아재 넷이 우르르 효진의 집에 몰려와 냉큼 그 영화를 틀어보라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장씨는 아내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피했다. 거짓 핑계는 아니었다. 김씨는 '아무리 그래도... 괜찮겠어?' 하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런 광경이 익숙한듯한 효진의 모친이 '당신 이 건은 내일 얘기합시다' 하면서도 안주상을 차려내러 들어가고, 효진이 조용히 거실로 나와 꾸벅 인사를 하자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어이구... 첫째지? 잘 보니 다르긴 하네 그래. 이야... 진짜 기가막히게 닮았구만. 반갑습니다! 이거 사진이라도 한번..."
애초에 사단을 부추긴 박씨가 성큼 다가와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었다.
"아빠 철 좀 들어... 재밌게들 노세요 그럼."
효진과 모친의 그런 행동은 암묵적인 허락의 신호가 되었다. '예술가 집안은 역시 좀 다른가' 하고 판단한 아재들은 마음놓고 쇼파에 앉아 티비를 틀더니 박씨 아재가 유료 VOD를 결제했다.
"이거 내가 매출에 또 한푼 보탰수다. 안주값 해, 응. 이게 애국이지, 암."
시작하자마자 누운 8자 모양의 실루엣이 드러나더니 여자의 엉덩이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줄의 붉은 상흔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피어올랐다. '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간 고요해졌다. 술상을 내오던 모친이 '에그머니나'하고 놀라 상을 쏟아 거실이 난장판이 되었지만 곧장 난폭한 장면들이 정신없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잠시 어색한 침묵 뒤에 모친은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로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박씨는 벌써 이 영화를 다섯번째 본다면서 격양된 목소리로 무어라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김씨는 깜짝 놀라 달려나온 효진과 함께 거실을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부친 권씨는 아무 말도 행동도 없었다.
첫 장면의 엉덩이가 소은, 즉 본인 딸내미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후 마음을 추스르고 말없이 영화를 감상하던 권씨는 극 중 소은이 등장할때마다 두 눈이 사시가 되며 집중하지 못했다. 소은이 발가벗고 마을을 뛰어다니다 포효하는 장면에서는 '저 저 미친년...'하고 조그맣게 속삭이며 대신 질책하듯 첫째 딸을 흘겨봤고 효진은 그 장면에서 방으로 들어갔다. 죽음을 예감한 소은이 하나 남은 손으로 성기 깊숙히 무언가를 쑤셔박는 장면에서는 김씨가 자리를 떴다. 왼팔을 잃은 소은과 오른팔을 잃은 종윤이 손을 마주잡은 채 기이한 자세로 짐승처럼 정사를 나누는 장면부터는 박씨 혼자였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소은의 속삭임이 들릴 때 박씨는 홀로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고 효진이 나와서 티비를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