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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우주, 효영 - Bloody Oscar (관계, 범죄)

우주, 효영 - Bloody Oscar (2)

by 구운체리 2023. 9. 17.

2.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 등대로 향하는 부둣길,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종윤을 잰걸음으로 따라잡는 소은. 낚아채듯이 종윤의 손을 잡아올린다. 
'이거란다'
소은이 속삭인다. 종윤의 눈이 흔들린다. 카메라의 샷이 클로즈 업으로 두 사람의 입김을 잡다가 서서히 멀어지며 버드아이로 바뀐다. 느린 비트의 드럼소리가 점점 커지며 현악기 선율이 들어오고 음악이 깔린다. 화면이 암전된다.

"이 장면을 스무번을 찍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요? 배우님은 어떤 생각으로 스무번째 촬영에 임하셨을까요?"
“구성은 단순하지만 이야기의 첫번째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감독님이 평소보다도 훨씬 세심하게 이것저것 디렉팅을 주셨고, 우리도 그만큼 집중했어요. 몇번을 찍었는지 숫자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한두번은 아니었죠 분명히. 테이크가 늘어날수록 해가 떨어지면서 광량이 죽는다고 촬영감독님이 초조해하셨어요. 자연광으로 영상을 찍으려면 이런 것까지 고려를 하게되는구나, 배웠고요."
"하하, 벌써 연출자의 시점에서도 작품을 바라보고 계시네요. 말씀하신대로 얼핏 보기에는 굉장히 심플한 장면인데, 배우로서는 복잡다단한 감정표현을 담아야하는 어려운 미션을 받으셨을 것 같아요. 연기력에 대해 극찬을 받고 계시잖아요? 연기자의 시점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듣고 싶은데요."
"역시 예리하시네요, 대답을 피하고 싶었는데. 일단 너무 춥다는 생각이 제일 컸고요. 제가 감히 이런 대선배님들을 곁에 두고 연기관을 논한다는게 부끄러운 일이지만요, 저는 연기할때 원래의 제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순전히 제 생각이니까요. 이 장면은, 지금까지 지켜오던 소은이의 모든 것을 버리고 2막으로 나아가는 첫 발을 떼는 순간이에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예쁘게만 자랐던 소은이가 집안의 비밀을 종윤보다 한발먼저 알아채고, 원래부터 종윤의 머리 위에 있으면서 연기를 해왔던 것 같은 연기를 하죠. 예전의 소은이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에는 또 다른 용기를 필요로 하구요.
조금도 스포일러는 아니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겨우 저를 버리고 만들어낸 이 소은이라는 캐릭터를 도로 다시 무너뜨리는 작업이 어렵고 우울했어요. 많이 징징거리고 감독님 선배님들한테 조언을 많이 구했습니다. 우리 종윤이 선배님도 든든하게 저를 지켜줬고요. 귀찮은 티 안내고 귀여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종윤 역을 맡은 젊은 남자배우는 엄지를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고, 우주의 양옆에 앉은 두 원로배우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마이크를 받았다.
"다 늙어 죽어가는 우리랑 감독님을 다시 이렇게 관객들 앞에 데려다줬으니 우리가 감사할 일이지요. 요즘같이 극장이 어려운 시기에 더더욱."
인터뷰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한창 영화가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아야 했던 시기라 보다 핵심적인 장면들에 대한 해설을 곁들인 인터뷰는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천우주라는 배우의 말들과 태도는 금새 화제가 되었다.
관객들은 극중의 소은이가 고초를 겪은만큼 평행세계의 현실에서는 대책없이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현실의 천우주도 소은이라는 캐릭터와 성격적으로 무척 비슷했다. 겸손한 듯 당차고, 도발적인 듯 예의발랐다. 현실이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위 선배들 모두 예외없이 그녀의 그런 면을 이뻐했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그런 장면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신인배우 천우주의 이미지는 전례없이 치솟았는데, 와중에도 예능 출연이나 광고 등을 대부분 마다하며 이미지 소비를 최소화한다는 것이 미덕으로 칭송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