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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고양이 밥 (범죄, 미스터리)

고양이 밥 - (2)

by 구운체리 2021. 11. 19.

2.
 볼품없는 외모, 작은 키, 작은 성기, 잦은 병치레, 그리고 가난. 물려받은 수많은 고난을 긍정의 힘과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차례차례 지워나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 믿었다.
 아니었다. 가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알을 깨고 새 살에 세상 바람을 맞으며 기어다니는 일에 익숙해질 때 인간은 비로소 어른의 이름을 얻는다.
 내가 학창시절 희망에 부풀어 모은 3천만원을 졸업 직후 고스란히 은행에게 빼앗기고 나서야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부모는 각각 성실하고 비교적 선량한 사람들이었지만 지혜롭지 못했다. 아버지는 진부하게도 보증을 잘못 섰고 어머니는 진부하게도 투기에 실패했다. 당장 목도할 최악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갖고 더 크게 얻어맞게 될 선택마저 해버린 뒤에는, 나 또한 법의 울타리 안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합의 하에 완전히 연을 끊었다. 나의 부모가 나를 위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였다. 어쩐지 슬프지 않고 그저 차분했다.
 나는 졸업증과 전역증 두 개의 종잇장, 아니 전산 데이터 쪼가리와, 겨우 사람 구실 할 정도의 누더기들만 지닌 채 연고도 없는 지방에 던져졌다. 값이 되는 물건들은 대부분 빼앗겼다. 오래 간 신분을 숨기고 살았으니 그나마 값이 나갈 졸업증도 사실상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허약한 나의 몸은 단단해졌고 연기같던 나의 정신은 오직 생존만을 위한 방향으로 끈적하게 응결되었다.
 그 고단한 와중에도 사고를 몇 번 당했다. 한 번은 되는대로 돌던 막노동 임금을 현금으로 받아 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니다 그대로 전부 도둑맞았다. 그날 이후로 술을 끊었다. 또 한 번은 숙소의 장판 아래 숨겨두던 나의 전 재산이 느닷없는 누수로 눅눅히 젖어 들러붙는 바람에 반토막이 나버렸다. 은행에 대한 적개심을 줄이고 금융 기록을 남기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다.
 또 언제는 어느 양아치와 시비가 붙었다. 내가 먼저 맞았고 변변하게 되돌려주지도 못했는데 경찰 만나는 것이 두려워 합의금으로 된통 털렸다. 그때부터는 두려움이랄까, 미련같은 게 없어졌다. 어디 될대로 되라고 살아보다 여차하면 배라도 째라지 하는 심정이었다. 뱃 속의 물건들을 값 나가는 상태로 두고 싶지 않은데, 끊은 술은 도통 입에 다시 붙지를 않아 억지로 담배를 배웠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담배값을 내고, 또 길에 떨어진 장초를 주워 물기도 하며 몸을 조졌다.
 그렇게 내 원래 이름도 나이도 가물가물하게 시들어가던 즈음 수를 만났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훔치려던 지갑의 주인이었다. 담배값이 유난히 아깝게 느껴지던 어느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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