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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고양이 밥 (범죄, 미스터리)

고양이 밥 - (3)

by 구운체리 2021. 11. 20.

3.
 수를 만나고 나서는 유달리 성적인 꿈을 자주 꾸었다. 수가 그 대상은 아니었다. 꿈에 등장하는 법도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나의 어떤 죽어있던 자아를 깨워낸 것은 분명하다. 왕성하던 시절은 이미 꺾여들었고 하루하루의 삶을 견뎌내기도 바빴을 뿐더러 잠자리도 변변치 않은지라 오래동안 잊고 지내던 감각이었다. 먹는 것도 부실한 마당에 엄한 데 힘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고, 원한다고 되지도 않았다. 
 성욕은 커녕 제대로 발기한 것을 본 지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했으니.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저 혼자 되뇌이는 생각으로 서나 죽으나 크기도 비슷한 거 인생 다를 것 없다고 자조할 뿐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내 스무살 초반의 기억을 열심히 미화하고 있었다. 부끄럽고 찌질하고 보잘 것 없는 연애의 기억. 그때는 분명 아 그거 돈으로 돌려달라고 하지 말라고 이불을 걷어찼었는데, 지금은 그 돈이 얼만데 당장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라고 응원을 하고 있었다. 돌려받았더라도 은행을 위시한 채권자들이 몇푼 더 건져가는데 그쳤겠지만.
 군대에서 최 병장 그 개새끼를 끝내 들이받지 않은 것을 두고도 다시금 피가 끓었다. 영창 혹은 감옥 그리고 그 후의 삶이, 지금 나의 삶보다 더 나빴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그렇게도 부추겨서 그때의 나는 매일 밤 불편한 불덩어리를 명치에 품고 덜덜 떨어댔던가.
 지은아, 안 자고 갈거야?
 경멸의 시선을 보냈던 그때와 달리 꿈 속에서의 지은이는 못 이기는 척 곁에 머물렀다. 달아오른 몸은 꿈에서라도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그 적극적인 호르몬 파티에 발작하듯 신이 난 몸뚱아리는 젖꼭지도 채 까보기 전에 깨어나 곰팡이 선 낡은 벽지 앞에 곧추섰다. 몽롱한 상태에서 불규칙한 얼룩을 봉긋한 무늬로 생각하고 몇번 흔들다보면 눅진한 냄새에 머리가 아파 정신이 들어 도로 기운이 죽었다.
 문자의 힘은 놀라워서 지은이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 석자만큼은 또렷했다. 나는 벽지에 천박한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 이름 석 자를 눌러적었고, 그것은 그 뒤로 잠에서 깬 나의 허탈감을 줄여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글로 남기는 것이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그때였다. 담배값을 아껴 노트 한 권과 펜 한 자루를 샀고, 무언가를 두서없이 써남기기 시작한 것도 그 때이다.
 수를 만나고부터 나는 쓰기 시작했고, 단어는 문장이 되고 문장은 단락이 되고 곧 시작과 끝을 가진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꿈의 뒷 이야기를 이어적었고 어떤 때는 그날 만난 죽여버려야 할 웬수에 대한 험담을 적었다. 둘 다 구체화된 모습으로 꿈에서 만나기 위해 꾀를 부린 것이었는데, 글이 되어 노트에 적힌 것들은 꿈에 다시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연기처럼 떠도는 어떤 꿈의 가닥을 붙잡아 박제한 것 같은 신기한 감각이었다. 그때부터는 꿈에서 보고싶지 않은 것들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취미가 생긴 뒤로 담배도 끊고 운동도 관두었다. 몸의 건강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어쨌든 돈이 조금 더 모이기 시작했다. 객기로 시작한 담배가 제법 큰 타격을 주고 있었음을 알았다. 나는 노트를 한 권 더 사 가계부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출이 현명해졌고 삶에서 규칙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제법 많은 기술들을 몸에 익힌 나는 나름 서울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얄팍한 지식까지 있었으니 제법 사회에 쓸모있는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첫번째 구덩이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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