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터미널 편의점에서 나는 메로나를 하나 샀지만 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은 여름이고 내가 살던 곳에도 메로나는 있다는 것을. 바보같은 허탈함에 녹아 없어진 메로나처럼 온몸에 진이 빠지며 몸도 정신도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내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무엇에 홀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딱 하루 해가 뜨고 지는 사이 다녀온 틈에 내가 돌아갈 곳이 사라져있었다. 고양이 밥그릇은 그대로 있고 그 아래로 난 창문은 있는데 그 너머 공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빼곡히 메꿔버리기라도 한 듯, 빽빽한 오수와 시꺼먼 진흙으로 가득차있었다. 그 안에는 새끼 고양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반갑다는 기운을 뿜으면서도 눈은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밥그릇을 걷어찼던 그놈이 함께 돌아왔다고 쨍알대면서. 하지만 내가 놀란 건 돌아갈 방이 감쪽같이 메꿔졌다는 것 보다 그 고양이들이 하는 말을 명확하게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살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바로 보였다.
그곳은 방이 아니라 빗물이 빠지고 하수도가 흘러다니게 하기 위한 굴 같은 공간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며 마음에 고양이들에게 물었다.
“수는 어디에 있어?”
이번에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내가 헛것을 들었나보다 하는데 고양이들이 내 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가 나를 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내가 돌아온 것에 큰 실망이라도 한 듯. 수에게 말을 걸려고 목소리를 내는데 가래섞인 가르릉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이제 수의 표정은 실망보다 안쓰러움에 가까웠다.
“왜 이번에도 돌아온거에요. 밥도 충분히 줬는데.”
나는 문득 아득해졌다. 수는 이제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정말. 다시 올게요. 내일은 꼭 성공할 수 있을거에요.”
수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쭈그려앉아 나를 쳐다보기에 나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르릉대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풍채 좋은 노인이 다가와 그녀를 데려갔다. 집주인이었다.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수가 얘기했나, 그래서 내 방을 흙과 오물로 메워두었나. 그녀의 아기 고양이들이 편하게 머물기 좋도록. 하는 생각을 하는데 멀어지는 와중에 노인이 수를 힐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무슨 고양이 귀신 보인다고 게 쭈그리고 궁상을 떨었냐 이년. 할애비 일은 못 도와도 명성에 먹칠은 말아야 할 것 아니야.”
아 나의 주인님, 늙고 뚱뚱한. 기억의 밀물이 몰려왔다. 수 캐피탈의 캡틴, 수.
나는 이곳에서 맞아 죽었다. 배를 있는 힘껏 걷어차여 눈알이 핑 돌아 머리 꼭대기까지 타고 넘어간 뒤로 기억이 없는데, 사실 그 기억이 내 것인지 이 곳에 버려진 남자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 사실 내가 고양이인지 그 남자였는지 모르겠어서 그 기억이 나의 것인지 고양이의 것인지 모르겠다고 할 수도 있겠다.
둘이었던 우리가 죽음을 공유하며 하나가 된 것인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죽음을 계기로 둘로 쪼개진 것인지.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썰물처럼 밀려나가는 기억의 끝을 붙잡고 나는 선택할 수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나는 기억을 놓치지 않는다. 같은 내일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그때 나는 타다 남은 향을 담배처럼 핥고 있는 새끼 고양이들을 보았다. 나에게 바쳐진 젯밥을 제 먹이인 양 주워먹고 사는 그 길고양이들을. 내 가여운 새끼들을. 저녀석들이 제 힘으로 밥을 찾아 먹을만치 클 때 까지만. 고양이는 금방 자라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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