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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고양이 밥 (범죄, 미스터리)

고양이 밥 - (8) 完

by 구운체리 2021. 11. 25.

8.
 터미널 편의점에서 나는 메로나를 하나 샀지만 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은 여름이고 내가 살던 곳에도 메로나는 있다는 것을. 바보같은 허탈함에 녹아 없어진 메로나처럼 온몸에 진이 빠지며 몸도 정신도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내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무엇에 홀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딱 하루 해가 뜨고 지는 사이 다녀온 틈에 내가 돌아갈 곳이 사라져있었다. 고양이 밥그릇은 그대로 있고 그 아래로 난 창문은 있는데 그 너머 공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빼곡히 메꿔버리기라도 한 듯, 빽빽한 오수와 시꺼먼 진흙으로 가득차있었다. 그 안에는 새끼 고양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반갑다는 기운을 뿜으면서도 눈은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밥그릇을 걷어찼던 그놈이 함께 돌아왔다고 쨍알대면서. 하지만 내가 놀란 건 돌아갈 방이 감쪽같이 메꿔졌다는 것 보다 그 고양이들이 하는 말을 명확하게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살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바로 보였다.
 그곳은 방이 아니라 빗물이 빠지고 하수도가 흘러다니게 하기 위한 굴 같은 공간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며 마음에 고양이들에게 물었다.
 “수는 어디에 있어?”
 이번에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내가 헛것을 들었나보다 하는데 고양이들이 내 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가 나를 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내가 돌아온 것에 큰 실망이라도 한 듯. 수에게 말을 걸려고 목소리를 내는데 가래섞인 가르릉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이제 수의 표정은 실망보다 안쓰러움에 가까웠다.
 “왜 이번에도 돌아온거에요. 밥도 충분히 줬는데.”
 나는 문득 아득해졌다. 수는 이제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정말. 다시 올게요. 내일은 꼭 성공할 수 있을거에요.”
 수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쭈그려앉아 나를 쳐다보기에 나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르릉대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풍채 좋은 노인이 다가와 그녀를 데려갔다. 집주인이었다.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수가 얘기했나, 그래서 내 방을 흙과 오물로 메워두었나. 그녀의 아기 고양이들이 편하게 머물기 좋도록. 하는 생각을 하는데 멀어지는 와중에 노인이 수를 힐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무슨 고양이 귀신 보인다고 게 쭈그리고 궁상을 떨었냐 이년. 할애비 일은 못 도와도 명성에 먹칠은 말아야 할 것 아니야.”
 아 나의 주인님, 늙고 뚱뚱한. 기억의 밀물이 몰려왔다. 수 캐피탈의 캡틴, 수.

 나는 이곳에서 맞아 죽었다. 배를 있는 힘껏 걷어차여 눈알이 핑 돌아 머리 꼭대기까지 타고 넘어간 뒤로 기억이 없는데, 사실 그 기억이 내 것인지 이 곳에 버려진 남자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 사실 내가 고양이인지 그 남자였는지 모르겠어서 그 기억이 나의 것인지 고양이의 것인지 모르겠다고 할 수도 있겠다.
 둘이었던 우리가 죽음을 공유하며 하나가 된 것인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죽음을 계기로 둘로 쪼개진 것인지.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썰물처럼 밀려나가는 기억의 끝을 붙잡고 나는 선택할 수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나는 기억을 놓치지 않는다. 같은 내일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그때 나는 타다 남은 향을 담배처럼 핥고 있는 새끼 고양이들을 보았다. 나에게 바쳐진 젯밥을 제 먹이인 양 주워먹고 사는 그 길고양이들을. 내 가여운 새끼들을. 저녀석들이 제 힘으로 밥을 찾아 먹을만치 클 때 까지만. 고양이는 금방 자라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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