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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투명개미에 대한 연구 (SF)

투명개미에 대한 연구 - (4)

by 구운체리 2021. 12. 14.

4. 가설 1: 기억과 창작
그녀의 손녀 딸이 투명한 황금 개미를 언급했다면, 선생님은 나를 곧장 생각해냈을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 당시 혼자 너무 다른 세상에 집중하는 동안 현생에서는 미취학아동도 안 할 법한 실례를 해버리고 말았으니까.
어느 누군가는 너의 그 상상력을 문학적인 방향으로 뻗어보라고도 했었다. SF 장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나. 그러나 그들은 결국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과 창작하는 사람의 일은 같지 않다는 것을.
기억과 창작이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의 경우 기억하는 삶을 살았고 창작자의 그것과는 분명 달랐다. 다인도 마찬가지였고, 후에 잠시 만나게 된 우리와 같이 과거 너머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연구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관측의 사례로부터, 나는 기억하는 사람과 창작하는 사람이 같지 않고 따라서 기억과 창작은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다인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처럼 종말론을 부르짖으며 두려움에 떨었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인생을 꾸려나가기를 거부하며 방에 틀어박히곤 했다. 그럴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나보다 사교적이고 사회적이며 밝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안 선생님처럼 타인을 보는 눈과 듣는 귀, 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절망 모드에 돌입하면 나는 곱절로 두려웠다.
안 선생님은 그런 모습이 익숙하신지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밥이나 먹으라고 타박하셨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 지 모르고 우리의 육식성 식습관이 그 과정에 이바지하고 있더라도 당장 고기반찬은 입맛에 맞는지 다인은 밥만 잘 먹었다. 그럴때면 나는 다인의 눈치를 보며 육전을 집었다.
안 선생님은 손녀 딸의 망상증을 치료하거나 계도할 목적은 아닌 듯 보였다. 나에게도 늘 말씀하셨듯, *아무렴 어떻다니 너의 이번 생을 또 잘 마무리해야겠지*, 하셨다. 그저 다인도 나처럼 사회에서 1인분을 하며 자리잡을 수 있기를 바라셨고, 내가 도움이 되리라 믿으셨다. 나는 학위를 받는 대학원 과정은 재주 없는 헛똑똑이들이 자리 찾는 일을 그럴듯하게 미룰 수 있도록 세상이 제공한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말씀드렸다. 
*내가 다인이를 대학원에 보내달라는게 아니잖니.*
아, 나처럼이 그 나처럼이 아니구나.
대화가 잘 통하지 않을때도 안 선생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인의 있는 그대로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라도 하나 되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좋겠다며, 종종 둘 뿐인 가족식사에 나를 초대하셨다. 
여자 둘이 살던 집에 성인 남자가 들어오니 집구석이 좀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느냐, 농담을 던지면 다인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두다다다 쏘아댔고 나는 ‘그럴듯한 가정’을 위한 장식품의 역할을 다하며 입다물고 구경을 했다. 그러면 안 선생님은 그저 흐뭇하게 손녀 딸의 목소리를 감상하고 계셨다. 꽤나 그럴듯한 집구석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미소를 지으면 혼자 분한 다인은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 또 눈을 마주치며 더 큰 미소를 짓고, 그러면 다인도 표정이 풀어졌다.

어쩌다보니 다인과 나는 자리를 잡는데에 서로가 도움이 되었다. 다인은 하루에 열시간씩 돌아다니는 인터넷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고도 한동안 알려주지 않았다. 본인은 지원자격이 되지않아 관계자가 아니라지만, 관계자가 몇달전부터 여기에 있었는데 말이야.
사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찾고자 만든 모임에서 내건 학위 조건이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이, 특히 박사학위 소지자인 나에게는 분명하게 보였지만, 다인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학위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아니면 괜히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려나.
막상 내가 우리 둘을 함께 채용해달라는 지원서를 통과시키자 다인은 이상한 핑계들을 대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졌다. 
딱 그 즈음 안 선생님이 쓰러지셨다. 그녀가 암과 싸우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는 괜히 외면해왔었다. 그녀가 머지않아 우리의 곁을 떠나리라는 정해진 미래로부터 도망치고자 과거에 눌러앉아 있으려 그토록 밍기적거렸던 것 같다. 그런 우리의 몽매함을 인지하신 것인지 그녀는 우리에게 활로가 주어지자마자 곧바로 이어오던 스스로의 투지를 꺾으셨다.
그녀가 결국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기 몇 주 전, 우리가 합류했던 연구팀도 와해되었지만 굳이 알려드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도 유산의 일부를 남기셨고, 서로 힘이 되어 행복하라는 마치 주례사같은 마지막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떠나가셨다.
우리는 그녀의 몸이 자연 속에서 온전히 썩어갈 수 있도록 묻어드렸다. 자연이 그녀를 기억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