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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주사위 놀음 (범죄, 일상)

주사위 놀음 - (A-1)

by 구운체리 2022. 5. 9.

A-1.
낭만 오피스텔 705호에는 루저가 산다. 생긴 게 썩 나쁘진 않은데 제대로 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고 잘 씻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이 풍기는 기운 자체가 좀 어둡다고 해야하나?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거나 하더라도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 움츠려든 어깨와 갸냘프게 참고 있는 숨소리가 신경쓰일 정도로. 내가 그를 특별히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니냐고? 나도 모르게 그런 적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보편적인 첫인상이 공격적인 편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다. 체격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팀에서 주로 맡는 업무가 손님 접대인만큼, 나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친절함과 선량함을 드러내려고 일부러라도 애쓰는 편이다.
물론 나는 705호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605호에 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은 측간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놓은 대신 층간소음에 관대하게 지어졌다. 705호가 바퀴달린 의자에 앉아 드르륵거리며 이동하는 것은 물론 가끔씩 책상을 쾅쾅 내리치는 진동이라던가, 급하게 뛰어들어오거나 나갈때 생기는 발소리에 적응하는데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은 샤워실 어딘가를 타고 들어오는 듯한 그의 목청껏 내지르는 노래소리와 포르노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 외국 여성의 신음소리들. 실제 사람의 신음소리는 아닌 것이, 가끔 부자연스러운 멈춤과 구간반복이 들릴 때가 있고, 듣고 싶지 않은 남성의 목소리가 홀로 들리며 마무리되곤 하기 때문이다. 알라딘 주제가 'The whole new world'를 부르던 그 지저분한 목소리와 동일한.
층간소음은 나만 겪는 고초는 아닌 것으로 알고있다.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는 서로 배려하는 삶을 살기 위한 권고사항으로 소음 관련 안내 및 경고문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붙어있으며, 거기에는 답글이라도 달 듯이 낙서로 특정 호수들을 겨냥해 쓰여진 욕설들이 많았다. 1301호 커플에게 욕실에서만큼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자제해달라는 의미를 담은 1201호의 강렬한 육두문자와 1401호의 옹호하는 답글이 적혀있는 것을 보니, 욕실이 특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처음에 뭣모르고 방에서 홈트레이닝을 하다 아랫집에서 민원이 들어온 이후로 두꺼운 요가매트를 사고 무거운 중량의 바벨 등은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나는 705호에게 직접적인 민원을 제기한 적은 없다. 대신 1201호의 그 눈에 확 들어오는 빨간 경고문구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별표를 그려주어 욕실 방음에 대한 경각심이 은연 중에 들 수 있기를 기도했을 뿐이다. 705호 이새끼는 앞을 안 보고 다녀서 아직 못 본 것 같지만.
추측하건데 늦깎이 대학생인 것 같다. 무언가 많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십 대 중후반 즈음의 나이로 보이고, 새벽에 잠들지 않는 야행성이면서도 주중에 가끔은 규칙적인 시간에 그놈의 바퀴달린 의자에 앉아 활동을 하는 것 보면, 정해진 시간에 비대면 수업을 듣는 청년이 아닌가 생각된다. 똑부러지지는 않아도 배움이 모자라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원격으로 일하는 것이 일상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회사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저렇게 안 씻고 털관리가 안 된 채로 살아갈 수가 없지. 온 몸을 방호복으로 가리고 일을 하는게 아니라면 말이다.
시국으로 인해 방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며 사소한 생활소음들로부터 타인의 사생활을 강제로 유추할 수 있게되어버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주 사용하다보니 청각이 점점 발달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반대로 내가 나를 노출시키는 소음들을 감추어담기 위해 몸가짐을 사리다보니 내 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억울한 기분이다. 돈을 더 벌어서 보다 튼튼한 곳으로 옮기던가, 체력을 더 길러서 서울에서 멀어지던가 해야지. 
좋아, 오늘은 유산소 두 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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