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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주사위 놀음 (범죄, 일상)

주사위 놀음 - (A-2)

by 구운체리 2022. 5. 16.

A-2.
아침에는 조깅을 한다. 산책로가 한 바퀴에 4km라 컨디션이 좋을때는 네다섯바퀴를 돌고, 아무리 힘들어도 한바퀴 이상은 매일 달린다. 달리기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운동 중 하나다. 그 다음 가는 것으로는 수영, 테니스, 데드리프트 등이 있지만 아무 장비없이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달리기 뿐이다.
아침 운동 후에는 가벼운 샤워를 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출근을 한다. 비대면으로 근무를 할 때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켠다. 회사는 걸어서 30분 거리 이내이고, 주 2회 정도 현장으로 출근을 한다. 일을 한 지는 일년이 조금 안 되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시키는 모든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다. 특히 전염병으로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진 세상에서 별다르게 준비해 둔 것도 없던 나는 운이 좋았다. 어려서부터 나를 좋게 봐주시던 형님의 추천으로 간단히 입사하게 된 것이다.
면접 때 보여준 것이라고는 잘 가꾸어진 내 심신과 그에 맞는 건강한 생활습관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만 그렇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도 않았기에 별다른 특기를 가꾸지 못했다. 그 흔한 노래방이나 PC방도 많이 안 다녀봐서 뜬금없이 장기자랑을 시켰을 때는 겨우 생각해낸 것이 군가였다. 깊은 산 높은 골 어쩌구... 그마저도 가사를 헷갈려 뒷부분은 허밍으로 불렀는데 음정도 아마 죄다 틀렸겠지. 그래서 당연히 떨어질 줄 알고 별 기대를 안했건만, 바로 다음날부터 사무실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었다. 비록 아쉬운 처지이지만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훌륭한 회사에 인맥을 써서 낙하산으로 입사하게 되었거나, 훌륭하지 못한 일을 하는 회사라고 생각해 나를 추천해주신 형님께 전화를 걸었다. 검색을 해 봐도 뭐하는 회사인지 명확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형님은 껄껄 웃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요지는 결국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에 운이 작용하며, 좋은 형님을 곁에 두는 것도 능력이다, 실력으로 증명해라 이런 얘기였다. 위험하거나 불건전한 곳은 아니지만 다녀보고 아니다 싶으면 새로운 곳을 다시 추천해주겠다는 말에 우선 마음을 놓고 출근해 보았다. 복지와 급여가 생각보다 좋았다. 지금 살고있는 오피스텔도 회사에서 제공해준 것인데, 회사에서 부지와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직접 건축에까지 관여했다는데 건축 쪽 일을 하는 곳은 아니다보니 아무래도 사장이 건설업주한테서 돈을 떼인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렇게 날림으로 지어져 층간 소음이 심한건가 싶었다. 
사장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고,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의 인상은 전부 좋았으며, 낙하산처럼 들어온 나를 고까워하거나 견제하지 않았다. 내가 배정받은 부서는 기획부이지만 우리 부서에서 어떤 기획을 하거나 비슷한 회의를 한 적도 없었다. 처음에는 컴퓨터와 어떤 프로그램을 주고 알 수 없는 글자와 숫자들로 가득한 시꺼먼 창에서 잘못된 예시의 것들을 골라내는 일을 맡겼다. 체력과 꼼꼼함이 필요한 일이었고, 나는 문제없이 해냈지만 조금씩 좀이 쑤신다는 티를 냈던 것 같다. 
그러자 어느 날 팀장이 불러 회사 차량을 주더니 공항에서 누구를 좀 모시고 오라고 했다. '영어는 좀 하지?'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을 비밀로 하고 가는 길에 유튜브로 기초 회화를 연습하며 일러준 곳에 나갔는데, 상대는 영어를 못하는 중국인이고 한국어를 나보다도 잘했다. 거기서 순간 기가 막혀 긴장이 느슨해졌던 것 같다. 내가 던지는 농담을 그 중국인이 너무도 좋아했고, 그는 돌아갈때도 나의 배웅을 요청했다. 중국인이 행복해하는 것을 사장이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손님 접대에 특화된 직원이 되어 회사에 적응했고, 무슨 일을 하러 오는 손님들인지도 모른 채 최고의 접대부가 되었다. 대부분 중국, 러시아에서 오는 사람들이었고 가끔은 서양인도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기초회화를 숙달했고, 그들은 대개 한국어에 능통했다. 
어쩌면 내가 그들의 언어를 모르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두 명 이상의 손님을 태우고 이동할 때 그들은 가끔 사업에 관련된 얘기를 진지한 억양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그들이 무어라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끔 그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고 어떤 말을 던진 다음 내 눈치를 흘깃보며 대화가 끊어지는 부자연스러운 틈이 있을 때가 있었다. 추측컨데 내가 그 말들을 알아듣고 있는지 떠보기 위해 무슨 말인가를 뱉어본 것이 아닌가싶다. 그럴 때 내가 백미러로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영업 미소를 지어주면 그들은 곧잘 폭소를 터뜨리고 하는 것이었다. 뭐 나를 총으로 쏴서 어디 묻어버린다는 얘기라도 한 건가.
이런 시국에도 손님은 한달에 한두번씩 곧잘 들어왔다 나갔다. 한국에 있는 손님들이 멀리 이동할 때에도 나는 마치 전용 운전기사처럼 그들을 모셨다. 외부 일정이 없을 때는 그들이 '트래픽 관리'라고 부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코드 정제 작업을 했다. 방에 있는 날에는 항상 그런 작업에 몰두했으며, 그래서 윗집의 소음에 보다 민감해져 있기도 했다.
오후에는 시간이 많은 편이었고, 거의 매일 헬스장에 다닌다. 가격대비 시설과 관리자들의 세심함이 무척 훌륭하다. 5분할로 운동을 하며 삼대 중량을 늘리는 것이 삶의 낙이다. 이제 480까지 왔고, 한달 이내에 안전하게 500을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소위 말하는, 헬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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