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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주사위 놀음 (범죄, 일상)

주사위 놀음 - (B-2)

by 구운체리 2022. 5. 18.

B-2.
간단한 설문 문항에는 당연하게도 적어서 남에게 보여줘야 하는 개인적인 사생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차마 최근 성관계 빈도에 '3년간 1회'라고 적기가 민망해 '8일에 1회'라고 거짓말을 했고, 관계에 대한 만족도라던가 파트너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을 지어서 써냈다. 컴플렉스를 극복해야 파트너를 구하던가 말던가 하지. 
지원을 하고 며칠 뒤 모집대상에 선발되지 못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렇게 일상의 돈벌이에 다시 집중하고 있던 차에 잘못된 유혹에 잠시 넘어갔다. 군대 선임들이 얘기하던 소위 '사다리'방에 관한 꼬임에 홀랑 넘어가버린 것이다.
50만원을 넣으니 10만원어치 포인트를 서비스로 주었다. 이대로 빠져도 가만히 앉아서 10만원을 번 것이다! 이야, 임상실험보다 좋다! 나는 그 10만원을 사다리 왼쪽에 걸었고 8만원을 더 벌었다. 이번엔 18만원을 오른쪽에 걸었더니 30만원이 되었다. 순식간에 50만원이 80만원으로 불어났다. 처음에 60만원을, 그렇게 번 108만원을 전부 다시 걸었더라면 180만원이 되었을텐데. 계산하고보니 어쩐지 1이 하나 생략된 것 같은 잔고 숫자에 괜히 100만원을 잃은 기분이었다. 잘못돼서 전부 잃었다고 해봐야 50만원 아닌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재미로 즐기기에 심각한 액수는 아니니까.
그렇게 다음 사다리에서 40만원을 잃었고, 또다시 20만원을 잃었다. 두 번 이기고 두 번 졌으니 이번에는 분명 이길 차례다, 싶어 20만원을 마저 태웠더니 허망함이 남았다. 여기서 그만두었어야 했다. 위로금으로 5만원과 함께 쪽지가 왔다. 메신저 비밀 방에 들어오면 사다리 코드를 해킹해서 분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그가 말하는 수법이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때는 너무도 솔깃하고 달콤하며 무엇보다 짜릿함이 있었다. 아등바등 최저시급으로 일을 하며 푼돈을 모으는 친구들이 한심하게 보이고 코인이나 주식으로 대박을 친 선구자들이 신처럼 받들어지던 주변의 분위기에도 어느 정도 취해있었다. 
노동의 가치가 폭락하고 수많은 향락들이 제한된 지금, 이곳은 선지자들을 위한 천국과 다름없어 보였다. 내가 버는 돈이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빼앗아 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반대로 내 돈이 그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돈은 서로의 주머니에서 주머니로 옮겨다녔고, '운영비' 명목으로 야금야금 일정 수수료를 떼어가는 플랫폼 운영자들만이 돈을 버는 구조였던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현금화로 출금하는 것이 가능은 했지만 제한이 많았다. 그마저도 빼앗기지 않으려 안전장치를 걸어두었다는 것인데,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인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그 메신저 방의 방장은 본인이 짓궂고 정의에 찬 숨은 실력의 해커이며, 깡패들의 사업자금을 몰래 훔쳐다 의로운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임꺽정과 같다고 주장했다. 방 이름은 임꺽정방이었다. 그 증거로 내가 알아볼 리 없는 외계어가 가득한 컴퓨터 화면과, 본인이 채워준 여러 사람들의 통장 잔고들을 제시했다. 그는 대부분의 결과를 정확하게 맞추었고 아주 가끔, 틀릴 때가 있었지만 그건 나쁜 운영자들과 정의로운 해커의 싸움에서 잠시 반격을 당했을 때 뿐. 아주 기초적인 안전장치만 갖추고 위험에 대비하면 무조건 수익을 낼 수 있다고 사람들을 독려했고, 사람들은 그를 떠받들었다.
가끔 악의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수시로 내보내며 물관리를 하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말하는 안전장치란 흔히들 도박사의 역설이라 부르는 마틴-베팅법(이길 확률이 반반이면 잃은 금액의 두 배씩 계속 걸다보면 언젠가 손실액을 만회할 수 있음)에 불과했지만, 유려한 언변과 숭배하는 추종자들의 분위기에 휩싸여 나는 부모님이 도와주신 전셋방 보증금 1억까지 담보로 잡아 대출을 받은 뒤 들이박았고 최대 3억까지 불어났던 내 가상의 금고에는 순식간에 위로금 5만원만이 남아있었다. 최소 출금단위가 10만원이라 그마저도 현금화가 불가능했고, 마지막 남은 5만원은 오른쪽에 걸었다가 모두 날렸다. 정의로운 해커가 틀리는 빈도가 늘어나며 임꺽정방의 이탈자가 많이 생겨나던 즈음이었다.
임꺽정방을 나오고 나는 멍하니 검은 화면에 비친 내 추레한 모습을 마주했다. 게임에 빠진 지 보름 정도 되었고, 특히 최근 며칠동안은 씻지도 않고 배달음식만 받아먹으며 사다리 게임에 몰두하는 사이 아버지의 부재중 전화와 해고를 알리는 메세지가 와있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인생 좆됐다는 것을 실감하며 퀭한 눈으로 이메일 스크롤을 내리다 임상시험 어쩌구 제목의 것을 발견했다. 일종의 추가합격 비슷한 연락이었다. 발신자의 이메일 주소가 달랐지만 그러려니 했다. 한푼이 아쉬운 상황이었고, 몇백이 당장 손에 들어오면 그걸로 다시 1억까지 회복할 수 있다는 정신나간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임꺽정방은 수명이 다한 사기꾼 방이지만, 다른 방을 몇 개 찾아두었다. 그 놈이 그 놈이겠지만. 사기꾼이 손 털기 직전에 내가 빠져나오면 되지 않겠어? 우선은 자본금 몇 백이 필요했고, 나는 모든 부끄러움을 뒤로 한 채 그들이 시키는 모든 일들을 의심도 없이 했다.
기쁘게, 기꺼이. 이런 씨발.
그렇게 나에게 남은 건 폐인이 된 내 몰골과 지저분한 방구석, 말못할 비밀과 1억의 빚, 그리고 며칠에 걸쳐 이상한 크림을 바르고 자위를 하는 추잡한, 스스로 촬영한 것이 분명하며, 내 신분과 AV배우처럼 울부짖는 신음소리가 명확히 드러나고 합성이라곤 절대 씨발 불가능한 요소들이 촬영된, 영상과 그 영상을 손에 쥔 어떤 개새끼의 협박 뿐이었다. 
그냥 죽어버릴까. 난 진짜 병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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