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연재/주사위 놀음 (범죄, 일상)

주사위 놀음 - (B-1)

by 구운체리 2022. 5. 11.

B-1.
세상 미친 놈한테 잘못 걸렸다. 인생이 야금야금 망가지고 있다. 차라리 아주 송두리째 흔들어놨다면 어땠을까. 난 어쩌면 이놈한테 적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날 제 노예로 길들이려고 하는건가? 차라리 돈을 뜯어가지. 내 한심한 이야기는 잘못된 성 지식과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게 이렇게 될 일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상상도 못했다. 
하 진짜 병신. 제발, 비웃거나 속단하지 말고 끝까지만 들어줘. 난 이미 미쳐버린 것 같으니까.
난 원래 공부를 곧잘했다. 어렸을 적 성적을 유지했다면 서울대도 거뜬히 들어갈만큼. 고등학교 내신 관리도 기타 학생기록부도 나쁘지않게 채웠는데, 수능 날 과민성 대장 어쩌구 때문에 듣기평가 와중에 좋지 않은 신호가 오더니 줄줄이 죽을 쒔다. 차라리 그날 거기서 시원하게 똥을 싸버렸더라면 덜 부끄러웠을까. 내 뒤에 앉은 아이가 방귀 좀 적당히 뀌라며 죽탱이를 날리려는 것을 그 뒤에 앉은 친구가 말리지 않았다면 또 어땠을까. 남 탓을 할 핑계가 하나 더 생겼겠지.
아무튼 수능을 말아먹고 간신히 인서울 대학교에 들어가며 고3 담임과 집안의 빈축을 샀지만, 재수에는 성공해 제법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고 지난 세월을 너무도 알차게 보상받으려다 연달아 두 번 학고를 받아버렸다. 학과장 교수님과의 면담 끝에 제적에 대한 경고를 받으며 나는 군대에 다녀오기로 했고, 아버지 힘을 빌려 집에서 멀지 않은 부대로 배정받았는데, 운도 지지리도 없지, 몸이 편한만큼 정신이 혹독하게 갈려나가는 곳이었다. 아버지께 하소연을 해봐도 나약한 놈이 집 가까운데 어렵게 꽂아줬더니 반찬투정 한다는 꾸지람만 들었다.
어머니는 내가 일병을 달았을 즈음에야 내 학교 성적을 알게 되셨는지 휴가나온 내 베레모를 향해 손질하던 고사리 나물을 집어던지셨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담배를 태우시며 나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끊겠노라 선언하셨다. 나는 울고 계신 어머니 앞에 마주앉아 울면서 맹세했다. 제대하고는 정말 정신차리고 다시 열심히 살겠다고. 내 힘으로 독립해서 집안의 도움 일절도 없이 등록금을 비롯해 살아숨쉬는데 필요한 모든 돈을 직접 벌겠노라고. 아버지는 회사에서 나오는 자녀등록금 지원의 건이 있으니 나머지만 알아서 하라하시며, 나의 독립과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밥벌이에는 찬성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정이라며 자취방 전세 보증금을 보태주시고 이자 대신 수시로 연락해 생활보고 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렇게 제대할 즈음이 되니 유행성 전염병으로 인해 나라 경제와 사회 분위기 모두가 아작이 나있었다. 음식점과 유흥 시설들은 문을 열어도 영업 시간에 제한이 있었고, 그마저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손님도 모자란 판국에 당연하게도 아르바이트 자리는 빈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선택지가 줄어들다보니 학업과 병행하며 빈 시간들을 알차게 채울 방도가 많지 않았다. 명문대생에게 좋은 돈벌이의 길은 아무래도 학원이나 과외시장에 있지만, 그마저도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도망치듯 학교를 떠나 군대에서 도를 닦는 동안 쪼그라든 인맥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중개업체를 통해 찾아보려고 하니, 추천인의 평판 검증과 학점 인증 등을 거쳐야 보다 좋은 조건으로 학생을 구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두학기 이수학점 6학점의 유망한 제적후보생에게 과외를 맡기고자 하는 학부모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임상실험 광고에까지 관심을 두게 되었다. 변변찮은 학원의 일자리를 하나 구하기는 했지만, 서울의 숨막히는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각종 공과금, 통신비, 교통비, 인터넷, 잡다한 보험료 등등 숨만 쉬는데에도 그렇게 많은 돈이 나가는지 처음으로 체감했다. 
주말에 물류센터에서 바코드를 점검하고 짐을 나르는 일일 알바도 몇 번 했는데 생활주기도 이상해지고 무엇보다 사람 성격이 너무 나빠지는 것이 느껴져 그만두었다. 가게의 홍보를 담당하는 판촉 알바 비슷한 것도 해봤는데 인상이 서글서글하지 않다는 이유로 금방 퇴짜맞았다. 보다 단가가 높은 일들은 얼핏 보아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보였다. 그러던 와중에 '그' 임상광고를 보아버렸다.
나는 건강한 성인 남성이고, 모범생으로 남들보다 일년 긴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생으로 지낸 첫 일년동안은 실속도 없이 술만 너무 많이 먹은 것이 문제였다. 내 외모도 정신도 가꾸어지지 못했고, 술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눈 적이 없으니 연애 그 비슷한 것조차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남들이 술자리에서 청춘을 꽃피우고 역사를 만들 때 나는 광대짓만 열심히 했다. 한 살 많은 형이지만 스스럼없고 재밌다는 평에 갇혀서. 그러고 쫓기듯 군대에 가니 하는 얘기라고는 죄다 섹스에 대한 것 뿐이었다. 무슨 여덟살때부터 발기가 되어 사정을 해봤다는 놈이 있지를 않나, 연달아 여덟번을 했다는 놈이나, 한 번에 여덟시간을 했다는 놈이나, 8이라는 숫자에 뭐가 있는지 다들 무용담이 하나씩 있었다. 내 별명은 8cm였다. 그것밖에 연관지을 것이 없어서.
어느 날 후임이 나와 같이 휴가를 나가자고 하더니, 나를 성매매 업소에 데려갔다. 베트남에서 온 친구가 내 옆에 앉았고, 우리는 자리를 옮겨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뭐에 홀린 듯이 첫 거사를 치렀고, 8초 만에 끝나버렸다. 베트남 누나는 기운을 북돋아주는 말로 나를 위로하려 했지만, 내가 미련어린 눈빛을 보이자 미소지으며 금방 옷을 챙겨입고는 방을 떠나버렸다. 후임은 이제 복귀하면 당당하게 별명을 갱신하라고 내 등을 두들겨주었지만 난 그 이후로 내내 조루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내 새로운 별명인 8만원도 그다지 명예롭지는 않았지만 (저 놈이 바로 첫 경험을 8만원주고 산 놈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내 성기능은 8초였다. 
그러던 와중에 SNS에서 조루증 개선 임상시험 피험자 모집 광고를 보았다.

'단편 연재 > 주사위 놀음 (범죄,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사위 놀음 - (B-2)  (0) 2022.05.18
주사위 놀음 - (A-2)  (0) 2022.05.16
주사위 놀음 - (C-1)  (0) 2022.05.13
주사위 놀음 - (A-1)  (0) 2022.05.09
주사위 놀음 - (0)  (0) 2022.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