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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주사위 놀음 (범죄, 일상)

주사위 놀음 - (ABC)

by 구운체리 2022. 5. 21.

A&B&C.
605호 청년은 직장 상사로부터 1301호에 사고가 생겼으니 급하게 좀 살펴봐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살고있는 곳이 회사 소유의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다소 황당한 요구에 당황한 청년은 손에 아직 덤벨을 들고있다는것도 잊고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그 방에는 가끔 마주쳤던 705호 학생이 내가 예전에 모신 적 있는 중년의 중국인 손님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완력으로는 중국인이 보다 앞선 것 같았지만 청년의 눈빛에 맛탱이가 가있는 것이, 광기로부터 한계 이상의 괴력을 끌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모자란 20kg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저런 절실함이었구나, 감탄하며 잠시 넋을 놓고 있자 중국인이 고함을 쳤다.
"어서 치우지않고 뭐해!"
그제야 정신이 든 청년은 학생을 중국인으로부터 가볍게 떼어냈다. 기름진 머리와 축축한 겨드랑이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체취와 촉감에 놀라 잠시 몸에 힘이 풀렸고 그제야 들고있던 덤벨을 떨어트렸다. 중국인이 손수건을 꺼내 몸에 묻은 학생의 침을 닦는 사이 그곳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반나체의 베트남계 여성이 냅다 12kg의 바벨을 낚아채더니 중국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계획한대로 한 방에 두개골을 으깨놓는데에는 실패했지만 수십차례 내려쳐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는데에는 성공했다. 청년은 달려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그를 저지하는 학생의 완력이 그 잠시동안의 시간을 벌어줄만큼은 되었다. 
중국인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여성은 체포되었는데, 불법 성착취 영상물의 피해자임이 밝혀져 동정 여론을 샀지만 결국 고국으로 추방되었다. 피해 사실과 중국인에 대한 폭력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고 그 사람이 사실 중국인이 아니더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 사람이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았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막았을텐데, 청년은 후회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주일 뒤에 회사가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심지어 헬스장마저 영업을 정리하니 청년은 삶의 낙을 잃은 기분이었다. 일자리를 알아봐준 형님도 연락을 받지 않았고, 중국인이 실려간 병원이 어디인지도 몰랐고, 그 학생의 행적마저도 묘연했다.
어느 날 여러 ATM기를 돌아다니며 거액의 현금을 꺼내 도망쳤더라는 소문이 건물에 돌았는데, 이웃 간의 왕래가 전혀 없던 오피스텔 내에 어떻게 그런 소식들이 돌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청년은 그간 일했던 경력을 발판삼아 새로운 회사를 찾으려했지만, 다녔던 회사의 이름을 아는 곳도 없었고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 설명할수도 없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받은 돈도 대부분 헬스장과 생활비에 쏟았으니, 삶의 일부가 뭉텅 잘려나간 기분이었다고 한다. 청년을 결국 다른 동네로 이사한 뒤 조그만 헬스장을 찾아 트레이너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3대 중량은 잠시 떨어졌다가 495까지 회복했다고.

705호 박 군은 죽기 전에 마지막 한 번의 섹스를 하려했다. 결국 그를 그 지경까지 몰고 간 조루 컴플렉스 만큼은 확인하고 가려고. 그렇게 찾아보니 지금 살고있는 건물에 영업소가 있었다. 그는 당장에 현금 얼마를 뽑아 그곳을 찾았다. 어쩐 일인지 그곳에는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고, 대뜸 그를 보자마자 무언가를 가르치고 훈계하려 들었는데 사람과 대화를 해 본 지가 오래라 말이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당장 반 벗고있는 여인이 하필 동남아 쪽 사람이라 더욱이 컴플렉스를 자극했던 것이다. 한참을 이어진 실랑이는 몸싸움으로 이어졌고 아랫층 사는 무서운 아저씨가 망치를 들고 그를 뜯어말리려는 사이 여자가 그 망치를 뺏어들고 다른 남자를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하지만 위험을 직감하고 도망친 박 군은 숨어서 벌벌 떨다 사흘이 지나고 20만원을 어디론가 이체한 뒤 PC방에 눌러앉아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클릭을 연거푸 누르다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박 군은 미친 사람처럼 ATM기를 찾아다니며 이천만원 가량의 현금을 인출했다. 원래였으면 고장이 나거나 누군가의 방해로 실패했을 현금 인출이 하필 그때에는 지휘센터가 마비라도 된 듯 순조롭게 풀렸다. 박 군은 밤중에 오피스텔에 들러 가방 하나에 짐을 전부 챙겨 도망나왔고 새로운 방을 구했다. 이젠 진짜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돈을 벌면서 살아야지 다짐하면서, 아직은 가족에게 밝히지 못할 비밀을 간직한채로.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보름 만에 정신을 차린 용씨는 그 동안의 손실과 자신의 과실을 되짚어보았다. 잃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버릴 것은 버릴 줄 알아야하지만, 본인과 눈이 마주친 셋 만은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감히 주인을 해치려 한 외래종과 잠든 주인의 지갑을 털어간 도둑물고기, 그리고 주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강아지는 나에게도 이 세상에도 해악스러운 존재가 아닌가.
용씨는 차분하고 냉정한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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