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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2) 2. 예진이 미국에서 첫 봄을 맞던 때 계훈이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다. 계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고 개중에도 막역한 관계는 없는 듯 했다. 그는 키가 크고 인상이 멀끔했으며 운동을 잘해 지윤이 활동하던 한인 테니스 부에도 돌아오자마자 에이스로 꼽혔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있고 언변이 좋아 원하는 사람을 붙들어두는 힘이 있었다. 이른바 알파메일이었다. 계훈이 그녀들을 처음 만난 날은 민영과 예진은 지윤의 독촉으로 이른 아침부터 억지로 동아리 행사에 끌려와 테니스 교류전의 선수등록과 물품 지급 등의 행사 운영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던 날이었다. 민영은 언제나처럼 만사가 귀찮고 그저 졸립다는 얼굴에 한편으론 한껏 멋을 낸 것 같은 세상 화려한 착장으로 앉아있었고, 그 옆에서 쉼 없이 조.. 2021. 12. 8.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 1. 민영은 어디에서나 튀었다. 왼손잡이에 간헐적 채식주의자였고 눈을 찌르는 원색의 긴소매와 팬티보다 살짝 긴 짧은 바지를 사시사철 즐겨 입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젠더와 성적 지향성 모두 퀘스쳐너리이며 가치관 중립적인 언어 체계를 배우고 완성하기 위해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소수자 아이덴티티를 패션으로 취사선택하는 관종이라 평가했다. 사람들이 보는 그녀는 오른손으로 밥을 잘 먹었고 육즙이 흐르는 고기 요리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했으며, 남자친구와의 연애 경험도 수차례 있었고, 언어는 영어조차 서툴렀다. 민영의 인스타 피드에는 삶의 기쁨과 슬픔이 극단적인 모양으로 전시되어 있었으나, 막상 현실에서 사람들과 그 깊이를 공유하는 일은 없었다. 미국 서부 유학생들의 한인 .. 2021. 12. 2.
투명개미에 대한 연구 - (2) 2. 연구의 배경 기억이란 뇌를 구성하는 뉴런의 시냅스 돌기에 엉겨있는 신경전달 목적의 단백질 덩어리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정의하는 근거들은 본인이 축적한 기억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있다. 단백질의 종류와 조합가능한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지만 결국 유한한 숫자이다. 따라서 인간이 도달가능한 영역은 유한한 범위로 제한되어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 덕에 인간은 임종의 맡에서 이번 생에 못 다 편 잠재력을 아쉬워하는 오만함을 반복할 것이고, 그 오만함이 어설픈 인지 능력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는 종의 연속성을 가능케 할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오만함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술에 어떻게든 다가가려 했다. 동명의 영화에서 착안한 ‘트랜센덧느’ 프로젝트는 인간의 의식을 네트워크에 데이터의 형.. 2021. 11. 30.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0) 프롤로그. 결혼식장에서 신부에 대한 뒷말이 오고가는 것을 듣고 있자니 곤혹스러웠다. 그 희생양은 저 무대 위에서 세상 모든 빛의 주인이 된 듯이 환한 얼굴이다. 나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그녀를 축하하기 위해 홀로 앉아있다.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자리를 뜨지도, 가십을 멈추어 달라고 말을 걸지도 않는다. 예진 양은 사람을 가리지도 않고 많이도 불렀다. 연락처만 있으면 친한 친구의 전 애인들까지도 부르고 본 것인지 나 또한 초대를 받았고, 그 대담함에 이끌려 망설이다 호기심이 귀찮음을 이겨 결국 오게 되었다. 내심 기다리던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공통분모가 없는 나는 그녀들이 처음 만났다던 유학시절 동기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 살그머니 끼어들었다. 정체를 물어보면 예전에 주워들었던 내용으로.. 2021. 11. 29.
투명개미에 대한 연구 - (1) 0. 초록 천사의 속삭임처럼 느껴지는 막연한 청각신호로부터 나의 생은 시작되었다. 내게 가장 오래된 고통의 기억은 내가 염소였을 적이다. 나는 네 발로 젖은 땅을 딛고 서서 물비린내 섞인 흙냄새를 맡으며 비탈진 언덕의 풀을 뜯어 우물대고 있었다. 어느 날카로운 이빨이 내 흉곽을 찢어발기기 직전까지. 아픈 줄도 모르고 거기에서 필름이 끊어졌다. 수 차례의 다른 종의 기억들을 거쳐 나는 지금 인간으로 여기에 있다. 인간인 나의 첫 기억은 비좁은 관처럼 생긴 미끄럼틀이다. 그저 호기심에 앉는 순간 떠내려가기 시작했고 아 좆됐다고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끄트머리에서 날카로운 빛이 스며들고 있었고 어째서인지 출구로 향하는 길은 점점 좁아지며 나를 짓눌러 으깨버리려고 했다. 거꾸로 도망쳐 오르고자 했지만 지나온.. 2021. 11. 26.
고양이 밥 - (8) 完 8. 터미널 편의점에서 나는 메로나를 하나 샀지만 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은 여름이고 내가 살던 곳에도 메로나는 있다는 것을. 바보같은 허탈함에 녹아 없어진 메로나처럼 온몸에 진이 빠지며 몸도 정신도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내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무엇에 홀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딱 하루 해가 뜨고 지는 사이 다녀온 틈에 내가 돌아갈 곳이 사라져있었다. 고양이 밥그릇은 그대로 있고 그 아래로 난 창문은 있는데 그 너머 공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빼곡히 메꿔버리기라도 한 듯, 빽빽한 오수와 시꺼먼 진흙으로 가득차있었다. 그 안에는 새끼 고양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반갑다는 기운을 뿜으면서도 눈은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밥그릇을 걷어찼던 그놈이 함께 돌아왔다고 쨍알대면서. 하지만.. 2021.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