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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개미에 대한 연구 - (5) 5. 연구 과정 소개 나는 일곱 개로, 연구팀의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편에 속했다. 무엇보다 그 시간 순서의 개념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처음엔 믿어주지 않았다. 내가 지표면에서 몇미터 높이에 있는지, 어제의 그곳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감각할 수 없듯, 시간에 대해 상대적 감각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냐고. 상대적인 감각을 신뢰한다고 지구가 평평한 것은 아니고, 내가 느꼈던 시간 감각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분명 지구의 젊음과 내 영혼 비슷한 무언가의 싱싱함에는 시간대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기록함에 있어 연구의 요소가 될 명제들과 서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잡담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다만 말로 떠들때는 그 구분이 모호해, 우리는 종종 일하듯이 놀고.. 2021. 12. 16.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5) 5. 예진은 친구들이 자신을 찾지 않으면 금새 토라지며 그것을 온 사방에 알린다. 민영의 경우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지만 역시 주기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어쩌다 친구들이 바빠져 그녀를 하루 이상 잊고 내버려두면 그녀의 SNS는 점점 기괴해져갔다. 별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정서가 그런 사람이라서. 거기에는 항상 계훈이 '좋아요'를 눌렀는데 그는 그럴때면 진심으로 낄낄대며 그녀의 피드를 탐방했다. 지윤의 해설을 곁들여 이해하고 보니 민영이 반쯤 정신을 놓았을 때의 코드가 은근히 계훈과 맞았던 것이다. 반면 지윤은 거의 체대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뭐에 미친 사람처럼 테니스를 쳤고 주말에 시간이 나면 장거리 하이킹을 다니기도 했다. 한인 모임과 캘리포니아를 넘어 미 서부 전역을 대상으로 한 테니스 대회.. 2021. 12. 15.
투명개미에 대한 연구 - (4) 4. 가설 1: 기억과 창작 그녀의 손녀 딸이 투명한 황금 개미를 언급했다면, 선생님은 나를 곧장 생각해냈을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 당시 혼자 너무 다른 세상에 집중하는 동안 현생에서는 미취학아동도 안 할 법한 실례를 해버리고 말았으니까. 어느 누군가는 너의 그 상상력을 문학적인 방향으로 뻗어보라고도 했었다. SF 장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나. 그러나 그들은 결국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과 창작하는 사람의 일은 같지 않다는 것을. 기억과 창작이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의 경우 기억하는 삶을 살았고 창작자의 그것과는 분명 달랐다. 다인도 마찬가지였고, 후에 잠시 만나게 된 우리와 같이 과거 너머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연구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 2021. 12. 14.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4) 4. 계훈과 민영의 사이에 진전이 없음이 뚜렷하게 보이자 사람들은 관심을 거두었다. 계훈은 민영을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고 이따금씩 마주칠 때면 민영은 깍듯이 예의를 갖춰 계훈을 대했다. 계훈은 그것을 한 단계 진전된 친분의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지윤이 보기에 그건 민영이 노골적으로 가시를 세우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누가 보기에도 그랬다. 지윤이 느끼기에 계훈은 겉만 우락부락하지 속은 영락없이 여리디 여린 어린아이 같았다. 나쁜 사람인 것 같지 않아 바보 같은 짓으로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싶었고 민영 같은 친구를 대하는데 필요한 주의사항들을 넌지시 일러주곤 했다. 계훈은 그런 지윤의 충고들을 드물게도 새겨들었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계훈은 지금까지 친구들을 상대함에 있어 동성이라면 카리스마.. 2021. 12. 13.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3) 3. 민영은 평소처럼 입고 나갔다. 예진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튀는 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에 민영의 옷장에도 유학생 치고는 다양한 상황에 맞는 옷들이 여러 벌 준비되어 있었다. 예진이 조잘대며 코디를 자처했지만 민영은 고집대로 숄이 늘어진 긴팔 블라우스와 짧은 청반바지를 입고 옅은 눈 화장과 잡티를 가릴 수 있는 최소한의 볼터치만 걸친 채 나갔다. 예진이 자신의 팔과 귀에 달린 쇳덩어리를 몇 개 떼어주려 했지만 민영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민영이나 지윤은 장신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민영의 서랍에는 상대가 누군지도 가물가물한 우정반지가 하나 있고, 지윤은 목에 거는 로켓 하나와 머리띠로 쓰는 팔찌만을 차고 다녔다. 온갖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잘도 균형을 잡고 돌아다니는 예진의 모습이 민영에게는 기인.. 2021. 12. 10.
투명개미에 대한 연구 - (3) 3. 추측 1: 황금 개미 “김군, 사과부터 할게요. 정말 미안해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이 그 이상으로 이상하게 느껴져서, 나는 또 내가 소중한 인연 하나를 망쳐버린건가 하는 망연자실함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이 못난 늙은이를 용서해주기바라요. 김 군의 도움이 정말 필요해요.” 제가 기대한 만남은 이런 흐름이 아니었어요 선생님. 온 세상에 단 하나뿐이던 숨구멍을 십여년만에 뒤져서 찾아냈는데 막혀있는 기분이라면, 이해하시겠나요. 아, 그런 표정 비겁해요. 제가 어찌. 제 간이라도 필요하다면 가져가세요. 하지만 절 아직 이해한다고 해주세요. 제발. “전 사실 김군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씨발. “하지만 김 군, 난 다 기억해요. 김 군의 이야기. 저, 진심이었어요. 학생들 상담하면서.” “저, .. 2021.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