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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18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1) 11. "일어나봐요 이 씹새끼야." 계훈은 불편한 자세로 잠에서 깼다. 술 냄새와 역한 풀냄새가 났고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노끈 같은 것으로 꽁꽁 묶여 있었는데 힘으로 끊으려다 파고든 부분들에 피가 통하지를 않았다. 모르는 집이었다. 처음 보는 흑인 남자애랑 민영이 그녀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민영은 날카로운 가위를 들고 있었다. "난리치면 다쳐. 이제부터 묶은 거 풀어줄건데, 허튼 수작 부리면 손이 엇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애. 이 가위는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이해했으면 고개 까딱." 계훈은 순간 자신이 납치된 줄 알고 겁에 질려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결국에 어딘가에 팔려가는 것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가. 참 아쉽고 한심한 삶이었노라. 서걱대는 가위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힘.. 2021. 12. 29.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0) 10. 예진의 한국 일정은 내한한 슈퍼스타의 그것을 방불케 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본인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놓았는지 몰라 일정을 조율하는데 애를 먹었다. 가족 관련 모임에만 꼬박 4일을 투자해야했다. 그녀의 귀국에 맞추어 부모님이 휴가를 내고 주말을 낀 캠핑 일정을 잡은 것이다. 아직 초년차 직장인인 오빠는 주말에만 잠시 들르기로 했다. 자신과 상의도 없이 잡은 일정이지만 예진은 차마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가족들 내에서 예진은 여전히 귀염둥이 아가였다. 미국에 간 뒤로 1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진은 민영에 대한 탐구 또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부산까지 다녀오려면 왕복으로만 하루가 꼬박 흘렀다. 비행기를 타면 빠르겠지만 그러려.. 2021. 12. 27.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9) 9. 지윤은 공항을 지나 바닷가로 향했다. 차를 잠깐 세워두고 바다를 보고 온 사이 지윤의 차는 좀도둑들을 만났다. 유료주차장에 자리가 없고 비교적 큰 거리인데다 대낮이니 잠깐이면 괜찮을거라 생각했지만, 누군지 모르는 그들은 대담하고 망설임 없이 운전석 유리창을 부수고 문을 열어 돈이 될 법한 물건들을 전부 가져갔다. 차량용 블랙박스와 휴대폰 거치대, 읽을 책과 노트북이 들어있는 그녀의 백팩, 그리고 예진이 선물로 두고 간 이쁜 꽃무늬로 포장된 -화장품으로 추정되는 크기의- 무언가. 만약을 대비해 여권을 몸에 소지하고 있던 습관 덕에 그나마 귀찮음을 덜었지만, 아직 공유 서버에 업로드하지 않아 로컬에만 저장되어 있는 노트북의 파일들이 생각나니 정신이 아득했다.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차였을.. 2021. 12. 24.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8) 8. 민영은 한국에서 홀로 지내는 동안 앞뒤가 맞지 않는 예진의 말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다. 귀찮게 들러붙던 계훈을 지윤이 처리해주느라 둘이 붙어 다니는 동안 예진이 자신에게 들러붙어 파고 들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흐름들이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예진은 자기가 자해를 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민영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민영은 그 누구에게도 굳이 자신의 과거를 자세히 공개한 적이 없었다. 부끄럽고 속된 일이기도 했고 그것을 꺼내어 들추고 다시 나열하는 작업들이 결코 편안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예진의 어떤 과거들은 그녀의 것과 똑 닮아있었다. 부모님의 맞바람이라던가 집안에서 마구 날아다니던 물건들, 그로 인해 날카롭게 조각난 가구의 파편들과 마음의 편린, 누구의 것인지 알 수 .. 2021. 12. 22.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7) 7. 과목마다 시험의 구성과 일정은 달랐지만 기말고사는 대개 비슷한 시점에 끝이 났다. 여느 한국의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도 시험이 끝나가는 기간에는 들뜨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캠퍼스 내부는 조용해지고 기숙사나 학생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역 등은 시끌벅적해지곤 했다. 번화가의 술집에는 참아오던 파티들이 다시 하나 둘씩 열렸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작은 무리의 친구들끼리 여행 계획을 잡기도 하는 반면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서로를 알아가는 네트워킹 행사들도 많이 잡혔다. 예진은 셋이서 해변가를 놀러가자고 했지만 민영은 팔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지윤은 물과 친하지 않아서 각자 거절했다. 각자 잠깐씩 .. 2021. 12. 20.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6) 6. 예진의 거짓말, 민영의 자해, 지윤의 테니스에 대한 몰두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되고 싶은 자신으로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자기 파괴적인 욕망이 함께했다. 셋 모두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파괴가 아닌 초월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도 같았다. 예진은 어린 시절의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만큼은 건드리지 않았고 가족사에 대한 자신의 거짓말이 행여나 돌고 돌아 부모님께 들어갈까 마음을 졸였다. 그녀의 수다스러운 성격에는 그런 정보의 과잉형성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도 한 몫을 했다. 민영은 결코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로 자기 자신을 망친 적이 없다. 그저 고통을 되새기고 죽음의 문턱 언저리에서 신세한탄 정도를 할 뿐이지, 언제나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수 있는 .. 2021.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