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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28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3) 3. 민영은 평소처럼 입고 나갔다. 예진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튀는 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에 민영의 옷장에도 유학생 치고는 다양한 상황에 맞는 옷들이 여러 벌 준비되어 있었다. 예진이 조잘대며 코디를 자처했지만 민영은 고집대로 숄이 늘어진 긴팔 블라우스와 짧은 청반바지를 입고 옅은 눈 화장과 잡티를 가릴 수 있는 최소한의 볼터치만 걸친 채 나갔다. 예진이 자신의 팔과 귀에 달린 쇳덩어리를 몇 개 떼어주려 했지만 민영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민영이나 지윤은 장신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민영의 서랍에는 상대가 누군지도 가물가물한 우정반지가 하나 있고, 지윤은 목에 거는 로켓 하나와 머리띠로 쓰는 팔찌만을 차고 다녔다. 온갖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잘도 균형을 잡고 돌아다니는 예진의 모습이 민영에게는 기인.. 2021. 12. 10.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2) 2. 예진이 미국에서 첫 봄을 맞던 때 계훈이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다. 계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고 개중에도 막역한 관계는 없는 듯 했다. 그는 키가 크고 인상이 멀끔했으며 운동을 잘해 지윤이 활동하던 한인 테니스 부에도 돌아오자마자 에이스로 꼽혔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있고 언변이 좋아 원하는 사람을 붙들어두는 힘이 있었다. 이른바 알파메일이었다. 계훈이 그녀들을 처음 만난 날은 민영과 예진은 지윤의 독촉으로 이른 아침부터 억지로 동아리 행사에 끌려와 테니스 교류전의 선수등록과 물품 지급 등의 행사 운영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던 날이었다. 민영은 언제나처럼 만사가 귀찮고 그저 졸립다는 얼굴에 한편으론 한껏 멋을 낸 것 같은 세상 화려한 착장으로 앉아있었고, 그 옆에서 쉼 없이 조.. 2021. 12. 8.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 1. 민영은 어디에서나 튀었다. 왼손잡이에 간헐적 채식주의자였고 눈을 찌르는 원색의 긴소매와 팬티보다 살짝 긴 짧은 바지를 사시사철 즐겨 입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젠더와 성적 지향성 모두 퀘스쳐너리이며 가치관 중립적인 언어 체계를 배우고 완성하기 위해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소수자 아이덴티티를 패션으로 취사선택하는 관종이라 평가했다. 사람들이 보는 그녀는 오른손으로 밥을 잘 먹었고 육즙이 흐르는 고기 요리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했으며, 남자친구와의 연애 경험도 수차례 있었고, 언어는 영어조차 서툴렀다. 민영의 인스타 피드에는 삶의 기쁨과 슬픔이 극단적인 모양으로 전시되어 있었으나, 막상 현실에서 사람들과 그 깊이를 공유하는 일은 없었다. 미국 서부 유학생들의 한인 .. 2021. 12. 2.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0) 프롤로그. 결혼식장에서 신부에 대한 뒷말이 오고가는 것을 듣고 있자니 곤혹스러웠다. 그 희생양은 저 무대 위에서 세상 모든 빛의 주인이 된 듯이 환한 얼굴이다. 나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그녀를 축하하기 위해 홀로 앉아있다.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자리를 뜨지도, 가십을 멈추어 달라고 말을 걸지도 않는다. 예진 양은 사람을 가리지도 않고 많이도 불렀다. 연락처만 있으면 친한 친구의 전 애인들까지도 부르고 본 것인지 나 또한 초대를 받았고, 그 대담함에 이끌려 망설이다 호기심이 귀찮음을 이겨 결국 오게 되었다. 내심 기다리던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공통분모가 없는 나는 그녀들이 처음 만났다던 유학시절 동기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 살그머니 끼어들었다. 정체를 물어보면 예전에 주워들었던 내용으로.. 2021.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