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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28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9) 9. 지윤은 공항을 지나 바닷가로 향했다. 차를 잠깐 세워두고 바다를 보고 온 사이 지윤의 차는 좀도둑들을 만났다. 유료주차장에 자리가 없고 비교적 큰 거리인데다 대낮이니 잠깐이면 괜찮을거라 생각했지만, 누군지 모르는 그들은 대담하고 망설임 없이 운전석 유리창을 부수고 문을 열어 돈이 될 법한 물건들을 전부 가져갔다. 차량용 블랙박스와 휴대폰 거치대, 읽을 책과 노트북이 들어있는 그녀의 백팩, 그리고 예진이 선물로 두고 간 이쁜 꽃무늬로 포장된 -화장품으로 추정되는 크기의- 무언가. 만약을 대비해 여권을 몸에 소지하고 있던 습관 덕에 그나마 귀찮음을 덜었지만, 아직 공유 서버에 업로드하지 않아 로컬에만 저장되어 있는 노트북의 파일들이 생각나니 정신이 아득했다.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차였을.. 2021. 12. 24.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8) 8. 민영은 한국에서 홀로 지내는 동안 앞뒤가 맞지 않는 예진의 말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다. 귀찮게 들러붙던 계훈을 지윤이 처리해주느라 둘이 붙어 다니는 동안 예진이 자신에게 들러붙어 파고 들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흐름들이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예진은 자기가 자해를 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민영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민영은 그 누구에게도 굳이 자신의 과거를 자세히 공개한 적이 없었다. 부끄럽고 속된 일이기도 했고 그것을 꺼내어 들추고 다시 나열하는 작업들이 결코 편안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예진의 어떤 과거들은 그녀의 것과 똑 닮아있었다. 부모님의 맞바람이라던가 집안에서 마구 날아다니던 물건들, 그로 인해 날카롭게 조각난 가구의 파편들과 마음의 편린, 누구의 것인지 알 수 .. 2021. 12. 22.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7) 7. 과목마다 시험의 구성과 일정은 달랐지만 기말고사는 대개 비슷한 시점에 끝이 났다. 여느 한국의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도 시험이 끝나가는 기간에는 들뜨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캠퍼스 내부는 조용해지고 기숙사나 학생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역 등은 시끌벅적해지곤 했다. 번화가의 술집에는 참아오던 파티들이 다시 하나 둘씩 열렸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작은 무리의 친구들끼리 여행 계획을 잡기도 하는 반면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서로를 알아가는 네트워킹 행사들도 많이 잡혔다. 예진은 셋이서 해변가를 놀러가자고 했지만 민영은 팔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지윤은 물과 친하지 않아서 각자 거절했다. 각자 잠깐씩 .. 2021. 12. 20.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6) 6. 예진의 거짓말, 민영의 자해, 지윤의 테니스에 대한 몰두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되고 싶은 자신으로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자기 파괴적인 욕망이 함께했다. 셋 모두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파괴가 아닌 초월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도 같았다. 예진은 어린 시절의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만큼은 건드리지 않았고 가족사에 대한 자신의 거짓말이 행여나 돌고 돌아 부모님께 들어갈까 마음을 졸였다. 그녀의 수다스러운 성격에는 그런 정보의 과잉형성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도 한 몫을 했다. 민영은 결코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로 자기 자신을 망친 적이 없다. 그저 고통을 되새기고 죽음의 문턱 언저리에서 신세한탄 정도를 할 뿐이지, 언제나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수 있는 .. 2021. 12. 17.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5) 5. 예진은 친구들이 자신을 찾지 않으면 금새 토라지며 그것을 온 사방에 알린다. 민영의 경우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지만 역시 주기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어쩌다 친구들이 바빠져 그녀를 하루 이상 잊고 내버려두면 그녀의 SNS는 점점 기괴해져갔다. 별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정서가 그런 사람이라서. 거기에는 항상 계훈이 '좋아요'를 눌렀는데 그는 그럴때면 진심으로 낄낄대며 그녀의 피드를 탐방했다. 지윤의 해설을 곁들여 이해하고 보니 민영이 반쯤 정신을 놓았을 때의 코드가 은근히 계훈과 맞았던 것이다. 반면 지윤은 거의 체대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뭐에 미친 사람처럼 테니스를 쳤고 주말에 시간이 나면 장거리 하이킹을 다니기도 했다. 한인 모임과 캘리포니아를 넘어 미 서부 전역을 대상으로 한 테니스 대회.. 2021. 12. 15.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4) 4. 계훈과 민영의 사이에 진전이 없음이 뚜렷하게 보이자 사람들은 관심을 거두었다. 계훈은 민영을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고 이따금씩 마주칠 때면 민영은 깍듯이 예의를 갖춰 계훈을 대했다. 계훈은 그것을 한 단계 진전된 친분의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지윤이 보기에 그건 민영이 노골적으로 가시를 세우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누가 보기에도 그랬다. 지윤이 느끼기에 계훈은 겉만 우락부락하지 속은 영락없이 여리디 여린 어린아이 같았다. 나쁜 사람인 것 같지 않아 바보 같은 짓으로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싶었고 민영 같은 친구를 대하는데 필요한 주의사항들을 넌지시 일러주곤 했다. 계훈은 그런 지윤의 충고들을 드물게도 새겨들었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계훈은 지금까지 친구들을 상대함에 있어 동성이라면 카리스마.. 2021.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