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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28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5) 15. 세 친구는 각자의 전공이 세분화되며 수업 시간표를 맞추기란 쉽지 않아졌다. 애초에 민영과 지윤은 함께하는 점심시간을 확보하거나 겹치는 동선 등을 짜 맞추는 데에 열의가 없었고 예진은 연락이 없었다. 지윤이 먼저 가끔 연락을 하면 답장이 오긴 했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어딘가 어색한 티가 났다. 예진의 활동 영역이 워낙에 넓어 다른 친구들을 통해서라도 소식을 들을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계훈과 사랑의 도피를 한 것 같다는 소문 외에는 들을 수 없었다. 캠퍼스에서 아주 사라져버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민영에게는 무슨 새로운 취미가 생긴 건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고 지윤은 교내에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그룹 단위 방과 후 활동 등에 열심히 참가해보기로.. 2022. 1. 7.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4) 14. "예진이한테 너무 모질게 군 거 아니야 어제?" "넌 아무것도 몰라." 지윤이 운전하는 차의 보조석에 앉은 민영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가 뭘 많이 모르긴 하나봐. 예진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너도." "아니 예진이 걔 말이야." "그래 예진이. 너 걔가 나랑 똑같은 목걸이 하고 온 거 알았니?" "내 다이어리를 훔쳐본 것 같아." "역시 그랬구나. 에, 뭐라고?" "뭐, 목걸이? 걔가 내 여자친구도 아닌데 알게 뭐야. 그건 또 어디서 구했대?" 민영은 다이어리를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곳에 항상 꽂아둔다. 위치를 딱 정해놓는 것은 아니지만, 양손잡이인 민영이 눈 감고 보다 편한 왼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수 있는 위치에 언제나 습관적으로 두어왔다. 예진이 민영의 방에 들러 네이.. 2022. 1. 5.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3) 13. 개강 전까지 셋의 어색한 관계는 이어졌다. 민영은 자신의 건강이 원래 목표 이상으로 좋아졌음을 확인한 뒤로 운동을 그만두었다. 말을 잘못 전달한데에 대한 미안함과 예진에 대한 찜찜함 때문에 민영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고, 지윤 또한 예진의 마음상태가 어떤지 몰라 민영이 먼저 나서서 어떻게 해주겠지 하고 기다렸다. 마음이 열리지 않았는데 먼저 다가갔다가는 영영 도망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진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감정이 바빴다. 예진이 원래 잡혀있던 약속들을 대부분 취소하고 민영이나 지윤과도 함께 다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윤은 처음에는 그녀를 걱정했다. 그리고 그녀가 연애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한편으로 안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함을 느꼈다. .. 2022. 1. 3.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2) 12. 예진이 돌아왔을 때 교내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자신이 잠깐 없는 사이 계훈이 사라지고 지윤과 민영이 그만큼 더 가까워져 있었다. 민영은 살을 빼겠다며 지윤이 짜놓은 말도 안 되는 극기훈련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고, 한국인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더 이상 그 둘이 겉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없이도 어쩌면 세상은 더 잘 돌아가는 걸까, 예진은 괜한 심술이 나고 외로워졌다. 둘과 달리 예진은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창구가 많았다. 예진 또한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들을 그만큼 흘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계훈에 대한 이야기는 원래도 조금 알고 있었기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결국 지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예진은.. 2021. 12. 31.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1) 11. "일어나봐요 이 씹새끼야." 계훈은 불편한 자세로 잠에서 깼다. 술 냄새와 역한 풀냄새가 났고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노끈 같은 것으로 꽁꽁 묶여 있었는데 힘으로 끊으려다 파고든 부분들에 피가 통하지를 않았다. 모르는 집이었다. 처음 보는 흑인 남자애랑 민영이 그녀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민영은 날카로운 가위를 들고 있었다. "난리치면 다쳐. 이제부터 묶은 거 풀어줄건데, 허튼 수작 부리면 손이 엇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애. 이 가위는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이해했으면 고개 까딱." 계훈은 순간 자신이 납치된 줄 알고 겁에 질려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결국에 어딘가에 팔려가는 것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가. 참 아쉽고 한심한 삶이었노라. 서걱대는 가위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힘.. 2021. 12. 29.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0) 10. 예진의 한국 일정은 내한한 슈퍼스타의 그것을 방불케 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본인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놓았는지 몰라 일정을 조율하는데 애를 먹었다. 가족 관련 모임에만 꼬박 4일을 투자해야했다. 그녀의 귀국에 맞추어 부모님이 휴가를 내고 주말을 낀 캠핑 일정을 잡은 것이다. 아직 초년차 직장인인 오빠는 주말에만 잠시 들르기로 했다. 자신과 상의도 없이 잡은 일정이지만 예진은 차마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가족들 내에서 예진은 여전히 귀염둥이 아가였다. 미국에 간 뒤로 1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진은 민영에 대한 탐구 또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부산까지 다녀오려면 왕복으로만 하루가 꼬박 흘렀다. 비행기를 타면 빠르겠지만 그러려.. 2021.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