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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포도 (4) 4. 나는 내가 면접에서 제기한 불공평한 혹평에 대해 주연이가 따지려는 줄 알았지만, 그런 건 사실 몰랐기도 했고 알았다고 한들 신경도 안 쓴단다. 다만, 내가 저를 멀리하다 못해 싫어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고. 주연이는 섬세한 친구였다. 그 원인을 아무리 곱씹어봐도 모르겠어서 곰곰이 되새겨보니 면접 때 일이 생각이 났더라고. 표면적으로는 결국 내가 던진 질문에 말문이 막혀 본인이 눈물이 터졌으니, 내가 난처했을 것이라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냐고. 서로의 첫 인상에 대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던 셈이다. 내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건, 여리디 여리면서도 도화살이 끼어있는 그녀의 첫인상이었지 그때의 난처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건, 그때 일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아닌 스스로에 .. 2021. 11. 6.
달콤한 포도 (3) 3. 간밤에 우리를 누군가 보았는지, 다음 날 소문이 파다했다. 주연이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세간의 관심 대상이었다. 나는 덕분에 디스패치에게 걸린 연예인의 기분을 십분 이해해버렸다. 아 이거 나중에 토론주제로 써야지. 아니 근데 뭘 안다고 별 볼 일 없는 못생긴 애라고 날 부르지, 들으라고 시비거나? 못생긴 건 인정해도 별 볼 일 없는 건 좀 아닌데. 방금 누가 내 자지 얘기했어. 이거 성희롱인데, 아니 그렇게 안 큰데. 내 이름 그거 아닌데 저 병신은 누구 계정 털고 있냐. 둘이 술을 마셨다더라, 쟤네 사귀냐? 아침에 둘이 같이 나왔다더라, 쟤네 잤다더냐? 밤에 막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갔다더라, 저 새끼 범죄자네? 조만간 뉴스에서 보겠네? 씨발 군대나 갈까. 주연이는 강한 친구였다. 워낙 인망이.. 2021. 11. 5.
달콤한 포도 (2) 2. 어느 봄날 주연이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 얘기 좀 하게 술 한 잔 하자고. 술 먹고 할 얘기라고. 그 느낌이 어째서인지 싸했었다. 다들 만점을 줬는데 내가 빵점을 주었다는 걸 어떤 입 가벼운 임원진이 술김에 털어놓았던 것일까, 그때는 걱정했다. 주연이의 동아리 활동 내용이 제법 훌륭해서 나는 다시금 회장 누님의 안목에 감탄했고, 주연이의 매력과 인간됨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공적으로는 꽤나 가까워지기도 했다. 제법 글을 잘 쓰고, 논리도 탄탄하고, 생각도 깊더라고. 아직 마주보고 토론할 때는 맹한 구석이 있었지만. 하지만 여전히, 왜인지 모를 감정적인 벽이 나에게 있었다. 임원이라는 감투에 취했던 그때에도, 그 아이는 어려운 새내기였다. 주연이의 연락을 받고, 설레는 기분도 있었.. 2021. 11. 4.
달콤한 포도 (1) 0. 애써 밝은 척을 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 상관이 없는 거야 이 머저리들아. 애초에 내가 니네보다 주연이랑 훨씬 친한데, 그 소식을 너네한테 처음 들었겠니? 뭘 안다고 위로를 해. 아니 내가 지금 조금 우울한 건 맞는데, ‘내가 짝사랑하던 여자가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게 되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내 아이는 당연히 아니고, 아닌 거 알면 묻지를 말고. 헛소문에 살 붙여서 디테일 만들지 말라고. 아이고 염병할. 덕분에 간혹 진심에서 우러난 응원의 눈빛을 보내는 덜 가깝고 더 선량한 지인들이 나는 더욱이 불편하다. 경솔한 사마리아인들 같으니.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을 비쳤다가는, ‘당신이 이해하세요, 아시잖아요?’ 서로 눈빛 교환하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줄 그 미필적 호의가 아른거려 골이 아프다. 그래서.. 2021. 11. 3.
당신의 이웃 (8) - 完 김한의 재판은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 그의 재판은 스포츠 리그의 결승만큼 인기가 있었고, 변호인석은 공석이었으며, 실제로 몇 건을 제외하고는 본인의 살인을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도 했기에, 이미 정해진 대본을 읽는 연극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가 사형을 선고받을지 보다 그 사형이 간만에 집행이 될까에 보다 맞춰져 있었다. 오른쪽 눈을 다쳐 붕대를 감고 나타난 그의 모습은 시각적 연출에 양념을 더했으며, 누군가 썩은 계란을 던져 그를 맞추려다 다른 방청객의 뒷통수를 맞추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담당판사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즉석에서 벌금을 선고하고 내쫓았다. 각종 언론은 미리 써둔 기사를 방송시간에 맞춰 앞다투어 내보냈고 김한이 사형을 선고받은 직후 장내에는 진정시키기 어려운 소란이 한동안 지속.. 2021. 11. 2.
당신의 이웃 (7) 한참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게 다듬은 내용이 이 정도이다. 김한의 입에서 나온 날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까지 정리를 하고나서 여전히 남은 의문점은, 왜 하필 완성의 대상으로 ‘사랑’을 선택했는가와 그 방법론에 대한 결론이 ‘살인’으로 튀어버렸는가 이 두 가지다. 김한에게 직접 물었을 때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며,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본인이 아닌 나의 역할이라며 드물게도 나를 질책했다. 눈치들 채셨겠지만 나는 그의 치료 및 분석과 정신감정을 맡은 그 주치의이다. 지금은 의사 직을 내려놓고 소설이나 쓰고 있지만, 인세를 받아먹으려고 쓰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한 공격을 멈추어달라고 쓰는 것도 딱히 아니다. 그저 당신 곁에 이런 이웃이 다녀갔음을 알려주는 것이 목.. 2021.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