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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92

우주, 효영 - Bloody Oscar (2) 2.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 등대로 향하는 부둣길,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종윤을 잰걸음으로 따라잡는 소은. 낚아채듯이 종윤의 손을 잡아올린다. '이거란다' 소은이 속삭인다. 종윤의 눈이 흔들린다. 카메라의 샷이 클로즈 업으로 두 사람의 입김을 잡다가 서서히 멀어지며 버드아이로 바뀐다. 느린 비트의 드럼소리가 점점 커지며 현악기 선율이 들어오고 음악이 깔린다. 화면이 암전된다. "이 장면을 스무번을 찍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요? 배우님은 어떤 생각으로 스무번째 촬영에 임하셨을까요?" “구성은 단순하지만 이야기의 첫번째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감독님이 평소보다도 훨씬 세심하게 이것저것 디렉팅을 주셨고, 우리도 그만큼 집중했어요. 몇번을 찍었는지 숫자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한두번은 아니었죠 분명.. 2023. 9. 17.
우주, 효영 - Bloody Oscar (1) 1. "효진씨! 나 물어볼거 있는데!" "저 아니에요, 닮은 배우고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 그래...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 예민하게 반응하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피곤하긴 하겠다. 난 그냥 너무 닮아서 소름이 다 돋더라지 뭐야." "제가 그 감독이 취향이 아니라서요. 되게 인상적인 역을 맡았나봐요? 연기경력도 뭐 없는 배우라던데." "아유, 말해뭐해. 한국사람들 호들갑 떠는게 좀 유난이긴 하지만, 오스카? 뭐 그런 상 받는다는 얘기도 나오드만. 좋은 상인가? 아무튼 영화보는데 진짜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난. 좋은 의미로, 응응." 효진은 부쩍 늘어난 동생의 인기를 대신 실감하는 중이었다. 별 생각없이 길을 걷다보면 대뜸 멈춰서더니 갸웃거리며 다가와서는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2023. 9. 14.
우주, 효영 - Bloody Oscar (0) 0. 누가 범인인가. 종윤, 떨리는 왼손으로 반쯤 깨진 안경을 주워든다. 창살 너머를 바라보면 카메라가 시선을 쫓아 하늘로, 우주로 나아간다.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 퍽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며 암전되는 화면 구석에 진득한 액체가 튄다. 조용히 멀어지는 발소리만 들린다. 화면의 전방위에서 범람하듯 액체가 모여드는데 자세히보면 지난 130분간의 모든 컷들이 섞여있다. 수챗구멍으로 사라지듯 한점으로 수렴하다 반짝하고 꺼진다. 옅어지는 빛무리는 소은과 종윤이 첫눈으로 만들려다 실패했던 눈사람의 몸통을 닮았다. 그 장면에서 둘이 투닥거리던 대사들이 희미하게 메아리치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스크랩] 대중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뽐내던 황감독의 고장난 작품시계가 드디어 세상과의 두번째 .. 2023. 9. 12.
래빗 헌팅 - (8), 끝 8) 토끼 사냥 메뉴얼 1. 제자리에서 총으로 겨눈다. 인간은 출발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2. 토끼들이 인간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개를 풀어 쫓는다. 개는 정해진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3. 개들은 훈련받은 동선대로 돌아오고, 영역 밖에는 덫을 두어 잡는다. 토끼는 경기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4. 살아남은 토끼들이 있다면 먹이를 주고 번식을 시켜 새끼를 깐 뒤 성체는 손님들에게 애완용으로 판매한다. 5. 총에 맞거나 개에게 물린 토끼들은 태우거나 짐승 먹이로 주고, 덫에 걸린 토끼들은 가죽은 손질하여 팔고 고기는 인간들이 먹는다. 파티에 고기가 부족할 시 4의 일부를 데려다 추가로 삶을 수 있다. Rabbit Hunting, 평행우주 1. 기환: 동전이 공장장의 손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기환은 벌떡 일어나.. 2023. 4. 15.
래빗 헌팅 - (7) 7) 기열 사람은 왜 살까? 나는 일찍부터 철이 들엇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또래 아이들이 천방지축 왁자지껄 이런 수식어를 달고 자랄 때부터 나는 입신양명 같은 네글자를 가슴에 아로새기며 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단어는 ‘전교일등’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일등만 기억하고, 기억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 배웠다. 부모님은 내 우주였고 그들의 말씀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교리였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을 언제 어디서나 드러내도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차성징이 지나고 머리통이 굵어진 친구들은 나를 때론 힘으로 어떨 때는 논리로 무너뜨리고는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PC방 근처에도 못가본 나는 그곳에 어둠의 마나 같은게 흐르는 줄로만 알았고, 컴퓨터 게임은 마약과 살인에 버금가는 사회악인줄로 .. 2023. 4. 13.
래빗 헌팅 - (6) 6) 우선 아침에는 네개, 점심에는 두개, 저녁에는 세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내가 어제 산 코인 가격이다. 잠결에 스트롱인지 스트리퍼인지 뭔지하는 코인을 백달러어치 사뒀는데 일어나보니 사백이었고, 지금은 삼백이 되어있다. 이런저런 수수료를 떼고도 이십만원 정도를 벌었다. 업비트에 가입하고 하루만에 쥐어본 수익이었다. 그날도 내 방송에는 다섯 명 정도밖에 들어오지 않았고 후원은 한푼도 터지지 않았다. 그 중 두개는 손님이 조금이라도 있어보이려고 내가 만든 부계정으로 접속한 것이니, 세 명이 다녀간 셈이다. 그 중 마지막 녀석이 퇴장하면서 ‘포람페 뱅온. ㅂㅂ’ 하고 채팅을 치기에 나도 방송을 접고 따라가봤다. 포람페라는 예명은 ‘포르쉐, 람보르기니, 페라리’의 앞글자를 따온 이름이다. 세가지 스포.. 2023.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