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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92

고양이 밥 - (3) 3. 수를 만나고 나서는 유달리 성적인 꿈을 자주 꾸었다. 수가 그 대상은 아니었다. 꿈에 등장하는 법도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나의 어떤 죽어있던 자아를 깨워낸 것은 분명하다. 왕성하던 시절은 이미 꺾여들었고 하루하루의 삶을 견뎌내기도 바빴을 뿐더러 잠자리도 변변치 않은지라 오래동안 잊고 지내던 감각이었다. 먹는 것도 부실한 마당에 엄한 데 힘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고, 원한다고 되지도 않았다. 성욕은 커녕 제대로 발기한 것을 본 지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했으니.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저 혼자 되뇌이는 생각으로 서나 죽으나 크기도 비슷한 거 인생 다를 것 없다고 자조할 뿐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내 스무살 초반의 기억을 열심히 미화하고 있었다. 부끄럽고 찌질하고 보잘 것 없는 연애의 기억. 그때는 .. 2021. 11. 20.
고양이 밥 - (2) 2. 볼품없는 외모, 작은 키, 작은 성기, 잦은 병치레, 그리고 가난. 물려받은 수많은 고난을 긍정의 힘과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차례차례 지워나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 믿었다. 아니었다. 가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알을 깨고 새 살에 세상 바람을 맞으며 기어다니는 일에 익숙해질 때 인간은 비로소 어른의 이름을 얻는다. 내가 학창시절 희망에 부풀어 모은 3천만원을 졸업 직후 고스란히 은행에게 빼앗기고 나서야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부모는 각각 성실하고 비교적 선량한 사람들이었지만 지혜롭지 못했다. 아버지는 진부하게도 보증을 잘못 섰고 어머니는 진부하게도 투기에 실패했다. 당장 목도할 최악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갖고 더 크게 얻어맞게 될 선택마저 해버린 뒤에.. 2021. 11. 19.
고양이 밥 - (1) 1. 외로운 짐승 둘이 자연스레 서로에게 울림이 되는 데에는 별다른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채는 데에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아주 사소한 우연으로 마주앉아, 서로의 불규칙한 숨소리에 불편한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 새 보이지 않는 타래에 엮여있곤 하는 것이다. 인지할 수 없는 공명이 서로를 이끄는 모양은 비극일 때가 많다. 상처입은 짐승은 더 진한 상처를 찾아 처절하게 떠돌아다니다 제 죽을 자리를 찾고나서야 멈추어선다. 스며들었다 지나간 악취는 시체와 함께 사위고, 묘비에는 남은 것들 중에 어떻게든 걸러낸 아름다움만이 쓰여진다. 아름다운 유혹은 또다른 외로운 짐승들을 그렇게 묶어 비극은 전염병처럼 번져 생명력을 유지한다. 심신이 위기에 처해있을수록 종족 번식의 욕.. 2021. 11. 18.
바다에 빠진 목탁 - (8) 完 8. 알음알음 알게 된 모교의 대학원생과 연애를 하다보니, 학문 그 자체와 학위가 불려주는 나의 몸값 모두에 동경이 생겼다. 동경은 구체적인 욕심과 계획이 되고 어느 새 현실이 되어버렸다. 회사는 내가 학위를 받고 돌아오면 더 좋은 자리를 준비해두겠노라 독려했지만, 어제의 동료를 내일의 상사로 만나게 되는 것도 후임으로 만나게 되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또 기왕 삶을 옮기는 거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은 욕망도 있어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로 많이 다녀보지 못한 해외를 향한 동경을 실현해보고 싶었다. 퇴직금 까먹으며 간간히 여행을 다니면서 그 동경은 또한 구체적인 욕심이 되었으나, 차근차근 쌓여가던 계획은 계획에 없던 사고가 끼어들어 무너졌다. 임신을 해버린 것이다. 어디서.. 2021. 11. 17.
바다에 빠진 목탁 - (7) 7. 두 번째 연애의 시작과 끝은 예의 그 술집이었다. 첫 연애가 끝난 날 바다를 불러 술을 먹는데,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던 남자 둘이 수군거린다 싶더니 바다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 내 번호를 따갔고, 연락을 주고받다 연인이 되었다. 저돌적이고 화끈한 성격의 남자라 사귈 때도 헤어질 때도 쿨했다. 본인의 욕망과 표현에 충실한 사람이라 함께 있으면서 나도 많은 것을 배우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나의 욕망을 살피고 존중해준다는 느낌은 받지 못해 일 년 정도 연애 기간을 채우고 권태가 오자마자 외로워져서 헤어졌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즐거운 기억이 많은 제법 재미있는 연애였다. 사람 자체가 유머 감각도 뛰어나기도 했고, 워낙 관심사가 많아 나에게 그 짧은 시간에 다양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던 것이.. 2021. 11. 16.
바다에 빠진 목탁 - (6) 6. 엄밀히 말하자면 J가 첫 번째 연인은 아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스무 살 재수하던 시절 교제하던 친구를 연인으로 세어야겠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련하고 또 가슴이 아리다. 첫사랑이라고 하기에 억울할 것은 없었다. 다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다기 보다 그때의 상황을 사랑했던 것 같고, 그 시절의 우울함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 친구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외로웠고 우울했다. 집에 돌아가서 잠들기 전에는 항상 엄마가 한 마디씩 나의 우울을 더욱이 안으로 쑤셔넣기 위해 찾아왔다. 본인의 우울을 나에게 꺼내보이며 나의 우울을 용납하지 않았고 괘씸하게 여겼다. 하루는 울고 있는 나에게 그냥 나가서 몸이나 팔라고 쏘아붙였고, 나는 이미 창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 2021.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