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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92

바다에 빠진 목탁 - (5) 5. 소문은 상상력을 먹고 자란다. 상상은 귀에서 다시 입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빈 부분에 살을 덧대는 역할을 한다. 상상이 쉬어가는 그 공백을 채워주고 또 입 밖으로 뱉는 과정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심어주면 길 잃은 소문은 곧 그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나는 보란 듯이 바다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단둘이 밥을 먹었고 캠퍼스에서는 바짝 붙어서 길을 걸었으며 종종 술도 같이 먹었다. 우리를 연인으로 인식하는 모르는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바다의 매력을 평가하는 사람이나 우리의 연애를 관음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별러진 대자보를 통해 혼꾸녕을 내줬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 편이 되어주었지만, 간혹 충고를 덧붙이기도 했다. 마음이 없는 남자와 단둘이 술을 먹거나 특.. 2021. 11. 14.
바다에 빠진 목탁 - (4) 4. 동아리는 의외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내가 감정이 북받친 상태에서도 논리적으로 대답을 이어가며 책임감 있게 면접을 끝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못해 초인적으로까지 느껴졌다나. 죄책감으로부터의 가산점을 받은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중에 면접관 중 하나가 농담이랍시고, 그 와중에 바다가 나한테 점수를 낮게 줘서 내가 수석을 놓쳤다고 얘기해줬다. 나이도 많은 게 철딱서니 없이 그런 말이나 옮기고 다니고 토론 동아리 임원을 하냐. 나는 혀를 찼고, 아니나 다를까 그 인간은 딱 그 해, 어린 나이에 조준 잘못해서 애 아빠 되고 인생 꼬였다기에 꼬시다고 신나게 비웃었었다. 내가 나중에 그 꼴이 똑같이 날 줄은 모르고. 그 와중에 바다 이 괘씸한 새끼. 미운 마음이 들기보다 친해져서 괴롭히고 싶어졌다. 애.. 2021. 11. 13.
바다에 빠진 목탁 - (3) 3. 내가 첫 연애를 하기 전, 예의 그 토론 동아리에서 친해진 남자 선배가 있었다. 빠른 년생에 현역으로 들어와 나보다 나이로는 어렸지만, 개중에 나이치고 그나마 성숙한 편이기는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들을 전부 통틀어서 가장 또라이 같은 사람이었다. 특유의 말과 행동 습관이 몇 가지가 있어 주변 사람들이 성대모사 하듯이 그걸 유행어처럼 따라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게 자신인 줄을 몰랐다. 완전히 생뚱맞은 지점에서 극도로 분노하는 성격은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목탁 들고 다니는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얘는 무슨 지게를 지고 다닌다. 항상 로봇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술이 만취해도 얼굴 표정이나 색은 하나도 안 변하는데 몸이랑 정신은 취해서 남들이 시키는 대로 별 이상한 .. 2021. 11. 12.
바다에 빠진 목탁 - (2) 2. 결과적으로 생각보단 오래 사귀었지만, 진지하게 만날 생각도 없었고 스스로 만든 내 처녀성에 대한 환상에 취한 모습이 즐거워 보여 굳이 깨주고 싶지 않아서 멋대로 하게 뒀다. 2년 정도 사귀다 헤어졌는데 1년 반 쯤 되던 크리스마스 무렵 이 녀석이 드디어 직접 이야기를 꺼내더라. 자기 나이가 곧 스물넷이고 우리가 만난 지도 곧 연차로 3년차인데 가슴 정도는 보여 달라. 정 안 되면 보면서 혼자라도 하겠다. 연애 초기에 그랬으면 미친 새끼인가 싶어 바로 연 끊었겠지만, 함께 한 시간 동안 이 친구가 변해온 모습들과 나를 만나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알고 있다 보니 그마저도 갸륵하게 보였다. 밤의 제왕이 신부님이 되었다고 떠나간 친구들이 한 트럭이라고. 근데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내가 포기하라고 한 것 .. 2021. 11. 11.
바다에 빠진 목탁 - (1) 1. 나는 쉽게 흥분하는 편이다. 좀처럼 감정을 주체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무던한 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종종 내 뒤에 서 계시는 부처님이 보인다고 하기도 한다. 목탁을 두들기는 것과 목탁으로 두들기는 것 모두 나의 페르소나이다. 나의 목탁은 내 심장소리에 맞춰 무엇이든지와 끊임없이 부딪히기 위해 태어난 나의 분신이자 나의 정체성, 나의 사랑. 비유법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나만의 목탁을 행운의 부적처럼 침대 맡에 두고 살았다. 실제로 두들긴 적은 많지 않았지만. 참고로 나는 교회에 다닌다. 종교적 의미를 담아 두들긴 적은 없다. 내 지랄 맞은 성격에 대해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나의 괴벽은 파도에는 무던하지만 잔물결에 미친 듯이 요동치는, 비유하자면 흔들림의 총량을 보존하.. 2021. 11. 10.
달콤한 포도 (7) - 完 7. 주연이의 첫 남자친구는 나를 경계하기도 했고 나도 그 양반 인상이 별로라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어 데면데면 했다면, 두 번째 남자친구와는 둘이 결별한 지금도 가끔 안부 정도 주고받는 친분이 생겼다. 내가 그 게이 친구 ‘산’과 친해져버린 탓이다. 그 술집이 관계의 발단이었으니 언제 한 번 보자고 하던 게 추진이 되어 넷이 만나게 된 것이다. 이성애자 커플을 맞은편에 앉혀두고 나는 잘생긴 게이와 나란히 앉아있자니 더블데이트 하는 것 같고 기분이 묘했다. 뭐 어떤 기류가 있던 건 전혀 아니었지만, 눈치껏 빠져준다고 두 연인 보내놓고 우리끼리 먼저 나오는데 어색하고 그랬다. 하지만 산이 대뜸 우리 둘이 되자마자 혹시 섹스하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는 평정심을 잃고 경기를 일으켜버렸다. 짓궂게 웃으며 ‘저랑.. 2021.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