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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92

투명개미에 대한 연구 - (1) 0. 초록 천사의 속삭임처럼 느껴지는 막연한 청각신호로부터 나의 생은 시작되었다. 내게 가장 오래된 고통의 기억은 내가 염소였을 적이다. 나는 네 발로 젖은 땅을 딛고 서서 물비린내 섞인 흙냄새를 맡으며 비탈진 언덕의 풀을 뜯어 우물대고 있었다. 어느 날카로운 이빨이 내 흉곽을 찢어발기기 직전까지. 아픈 줄도 모르고 거기에서 필름이 끊어졌다. 수 차례의 다른 종의 기억들을 거쳐 나는 지금 인간으로 여기에 있다. 인간인 나의 첫 기억은 비좁은 관처럼 생긴 미끄럼틀이다. 그저 호기심에 앉는 순간 떠내려가기 시작했고 아 좆됐다고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끄트머리에서 날카로운 빛이 스며들고 있었고 어째서인지 출구로 향하는 길은 점점 좁아지며 나를 짓눌러 으깨버리려고 했다. 거꾸로 도망쳐 오르고자 했지만 지나온.. 2021. 11. 26.
고양이 밥 - (8) 完 8. 터미널 편의점에서 나는 메로나를 하나 샀지만 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은 여름이고 내가 살던 곳에도 메로나는 있다는 것을. 바보같은 허탈함에 녹아 없어진 메로나처럼 온몸에 진이 빠지며 몸도 정신도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내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무엇에 홀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딱 하루 해가 뜨고 지는 사이 다녀온 틈에 내가 돌아갈 곳이 사라져있었다. 고양이 밥그릇은 그대로 있고 그 아래로 난 창문은 있는데 그 너머 공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빼곡히 메꿔버리기라도 한 듯, 빽빽한 오수와 시꺼먼 진흙으로 가득차있었다. 그 안에는 새끼 고양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반갑다는 기운을 뿜으면서도 눈은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밥그릇을 걷어찼던 그놈이 함께 돌아왔다고 쨍알대면서. 하지만.. 2021. 11. 25.
고양이 밥 - (7) 7. 일은 불규칙했고 수입도 지출도 따라서 불규칙했다. 하루 해의 길이도 불규칙하게 늘어나 이젠 불을 켜지 않고도 수의 얼굴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나는 더위와 습기를 견디다 못해 차림이 단촐해졌고 수는 내 속옷차림을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폐기 물품의 관리가 점점 까다로워지는 계절이었다. 규칙적인 것이라곤 거의 예외없이 다녀가는 그 노크소리 뿐이었다. 별다른 사건 없이 고양이들도 잘들 커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잘 울지도 않고 이따금씩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가끔 그 고양이들이 내 룸메이트가 아닌가 싶었다. 가계부를 쓴 이후로 그 상승의 기울기가 도로 꺾이지 않게 관리를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모이고 있는 돈이 제법 불어나니 전부 몸에 지니기에 버거워졌다. 많은 것을 몸에.. 2021. 11. 24.
고양이 밥 - (6) 6. 수는 먹을 것을 가져올때면 발로 툭툭 차서 노크를 했다. 안으로 넣어주지 않으면 고양이들이 뺏어먹을텐데 건강에 좋지 않다나. 신경쓰는 건강이 나의 것인지 고양이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로 이른 새벽 아침이었다. 새벽시간 담당과 교대를 하고 퇴근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일어나 하루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과 잘 맞물려 나에게는 적절했다. 최소한의 기능을 하는 휴대전화가 알람을 울려주기는 했지만 그다지 의존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무심한 발길질은 사람의 기운과 식량을 품고 있어 하루에 기분좋은 반복됨을 더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험한 동네에도 대기업이 운영하는 편의점이 있고, 음식이 남아 팔지 못하고 버려진다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포장지에 적힌 숫자가 한 찰나를 전후로 안에 들어있는 것의 가치를 바꾸.. 2021. 11. 23.
고양이 밥 - (5) 5. 뜻밖에 여자가 경찰을 안심시키고 돌려보내 나는 많은 귀찮은 일들을 면했다. 순식간에 사라져서 도둑을 맞을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구면인 친구가 장난을 친 것이다. 재미도 없고 실속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여러가지가 부족한 친구지만 잘 타일러볼테니 도로 일 보시라. 경찰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피차 귀찮은 일이 늘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납득하고는 돌아섰다. 좀 씻고 다니라는 핀잔을 툭 던지고는. 지가 물값 내줄건가 개 같은 놈이. 경찰이 사라지자 수는 멀찌감치 서서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미안합니다.” “그건 됐고. 당신 맞죠?” “시끄러워서 그랬습니다.” “지갑이?” “예?” “아 친구들. 그거 왜 그런 줄 알아요?”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누가 그 녀석들 어미를 죽였.. 2021. 11. 22.
고양이 밥 - (4) 4. 수를 만나기 전날 나는 사람이 죽은 것을 처음 봤다. 역겹고, 두렵고, 가여웠다. 나와는 다른 무언가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때부터 였는지도. 원초적인 생존의 감각 이외에는 전부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떤 감성적인 씨앗들이 슬그머니 발아하기 시작한 것이. 내가 사는 반지하 창문에 가뜩이나 좁은 볕들 틈을 큼지막한 덩어리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고까워 나가보니 날씨에 맞지 않게 얇은 속옷만을 걸친, 젊은 남성처럼 생긴 토막이 기괴하게 비틀린 채 놓여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인상을 찌푸린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론은 어쨌든 ‘죽고 싶지 않다’ 였던 것만 기억이 난다. 지금 죽고 싶지 않다-였는지 저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였는지는 모르겠지.. 2021.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