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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92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N) N. “대동흥 21기, 부동의 부흥을 위하여! 여기 부부끼리 오신 동창들이 많으시네요. 자, 제가 부부를 위하는 동안 여러분은 동흥을 위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에이 자, 잘 들어봐요. 제가 부를, 두 번, 크게 외칠테니까 여러분은 뭐라구요? 동, 흥! 자랑스러운 우리 모교의 이름을 외쳐주시고 함께 위하여, 외쳐주시면 되겠습니다. 자 큰소리로, 부, 부, 위하여!” 다소 연배가 느껴지는 주헌의 힘찬 권주사가 이어진 후로 오랜만에 모인 동흥고 21기 동창들은 시끌벅적하게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관한 술집은 가득차 간이의자를 가져와 좁게 모여앉아야했고, 실내는 금새 소리와 열로 가득찼다. “저기, 우리 고 의원님은 언제 오십니까?” 잠시 소란이 잦아들고 소강상.. 2022. 1. 31.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2) 2. 규민이 전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규민 혼자만 몰랐다. 용주도 그것을 알면서도 어울리고 있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창수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른채 할 뿐이었다. 정욱이 반장으로써 적당한 선에서 잘 통제하고 있으니. 왕따로 인해 사회성을 기를 기회가 없는 것이 먼저인지 타고난 사회성이 결여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른인 창수조차도 가끔 규민에게 분통이 터지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규민이 아니라도 아이들은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할 것이고, 기왕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규민이 되는 편이 편하다고 창수는 멋대로 생각했다. 아니, 정욱의 생각에 동조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선생으로써 자격미달인 행동이지만, 정욱의 입지와 그 부모님이 학교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제법 .. 2022. 1. 28.
당신의 이웃 vol.2 - (6) 6. 나는 전역 후 공 상병이 살던 동네에 집을 구해 그의 여자친구 병주를 만났다. 그때 이름을 처음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집안 살림을 거덜내고 병주를 때렸다. 병주는 그런 금수만도 못한 치도 아비라고 내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만약 사고가 아니었다면, 그건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에 떠있는 사람 배를 칼로 후벼놨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발버둥을 포기하고 가라앉아 익사했다면. 찌른 사람이 죽인거야, 스스로 빠져 죽은거야? 칼이 아니라 주먹으로 머리를 후드려팼다면 어떤데. 아니면 기껏 발버둥치는 사람한테 ‘구조대는 오지 않고 당신의 체온은 점점 떨어져 결국 예정된 끝을 맡게 될 것이며 괜한 저항은 고통의 시간만 연장할 뿐’이라는 악담을 퍼부었다면. 나는 공 .. 2022. 1. 27.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1) 1. “어휴 저 바보.” 정욱의 일침에 반 아이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담임인 창수는 그 분위기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저지를 하지도 않은 채 다만 소란을 진정시키고 진도를 나가려고 했다. “자, 자, 그만, 집중.” 규민은 자신의 대답이 왜 바보같은 생각인지 몰랐지만, 반 전체의 놀림감이 되니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반 아이들을 한번 크게 웃게 만들었노라 위안삼아보려 했지만, 기실 아이들을 웃게 만든 건 정욱의 공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놀림감삼아서.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놀림감이 된 날은 수업이 끝나고 정욱이 항상 규민의 자리를 찾아왔다. “그냥 넘어가면 너가 괜히 무안할까봐, 내가 잘 무마한거야. 알지?” 정욱은 공부도 제법 잘하고 어른에게 예.. 2022. 1. 26.
당신의 이웃 vol.2 - (5) 5. 나름 조용히 산다고 살았는데, 또래 남자들에 비해 스스로를 과도하게 포장하지 않으며 때론 과격한 생각들을 거침없이 뱉곤 하는 이미지가 신비롭게 팔려져, 뜻밖에도 몇명의 여자들과 더 인연이 닿았다. 그저 사회성이 부족해 대놓고 못할 말을 못 가리는 것 뿐이었지만. 특정 정치인의 자서전을 읽고 있는 모습이 또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같다. 그때 즈음엔 주하 선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원의 실마리를 찾았을까. 아직도 발버둥의 미학을 믿고 있을까. 얕은 관계의 반복 속에서 문득 나를 여기까지 밀어낸 파도를 만든 그녀의 작은 발버둥을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쾌락에 있어 몸과 정신의 만족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각자의 완성형을 엿보게 될 즈음 양쪽 모두를 마무리하고 군대에 가기로 했다. 대단한.. 2022. 1. 25.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O) O. “정직한 정치인. 과거에 떳떳한 정치인. 자신의 과오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뉘우치고, 바로잡을 줄 아는 정치인. 바로 저, 고정욱입니다. 여러분,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생각하시고 피눈물 흘리시면서 나쁜 놈들, 아주 못된 잘못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그런 놈들한테 표를 주셨죠.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시잖아요, 그런 질 나쁜 놈들이 여러분들을 대표하면 안 된다는거. 하지만 그게 어디 여러분 잘못입니까. 뽑을만한 사람이 없었던 우리 정치판이 문제였죠. 자, 제가 바로잡겠습니다. 저 경기도의 아들, 동흥의 자랑, 고정욱.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여러분 앞에 발가벗겨진 마음으로 섰습니다. 답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 올바른 사람이 마땅한 자리에 서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 2022.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