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139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1) 1. “어휴 저 바보.” 정욱의 일침에 반 아이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담임인 창수는 그 분위기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저지를 하지도 않은 채 다만 소란을 진정시키고 진도를 나가려고 했다. “자, 자, 그만, 집중.” 규민은 자신의 대답이 왜 바보같은 생각인지 몰랐지만, 반 전체의 놀림감이 되니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반 아이들을 한번 크게 웃게 만들었노라 위안삼아보려 했지만, 기실 아이들을 웃게 만든 건 정욱의 공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놀림감삼아서.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놀림감이 된 날은 수업이 끝나고 정욱이 항상 규민의 자리를 찾아왔다. “그냥 넘어가면 너가 괜히 무안할까봐, 내가 잘 무마한거야. 알지?” 정욱은 공부도 제법 잘하고 어른에게 예.. 2022. 1. 26.
당신의 이웃 vol.2 - (5) 5. 나름 조용히 산다고 살았는데, 또래 남자들에 비해 스스로를 과도하게 포장하지 않으며 때론 과격한 생각들을 거침없이 뱉곤 하는 이미지가 신비롭게 팔려져, 뜻밖에도 몇명의 여자들과 더 인연이 닿았다. 그저 사회성이 부족해 대놓고 못할 말을 못 가리는 것 뿐이었지만. 특정 정치인의 자서전을 읽고 있는 모습이 또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같다. 그때 즈음엔 주하 선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원의 실마리를 찾았을까. 아직도 발버둥의 미학을 믿고 있을까. 얕은 관계의 반복 속에서 문득 나를 여기까지 밀어낸 파도를 만든 그녀의 작은 발버둥을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쾌락에 있어 몸과 정신의 만족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각자의 완성형을 엿보게 될 즈음 양쪽 모두를 마무리하고 군대에 가기로 했다. 대단한.. 2022. 1. 25.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O) O. “정직한 정치인. 과거에 떳떳한 정치인. 자신의 과오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뉘우치고, 바로잡을 줄 아는 정치인. 바로 저, 고정욱입니다. 여러분,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생각하시고 피눈물 흘리시면서 나쁜 놈들, 아주 못된 잘못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그런 놈들한테 표를 주셨죠.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시잖아요, 그런 질 나쁜 놈들이 여러분들을 대표하면 안 된다는거. 하지만 그게 어디 여러분 잘못입니까. 뽑을만한 사람이 없었던 우리 정치판이 문제였죠. 자, 제가 바로잡겠습니다. 저 경기도의 아들, 동흥의 자랑, 고정욱.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여러분 앞에 발가벗겨진 마음으로 섰습니다. 답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 올바른 사람이 마땅한 자리에 서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 2022. 1. 24.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Preview) Preview, the monologues 규민) 먹잇감이 되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어진 자리라고 하더라도 그 위치가 먹이사슬의 최하층이 아니라면. 더군다나 나는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서 그 자리를 얻어낸거잖아? 정욱) 그 어떤 떳떳하지 못한, 청산하지 못한 과거도 없는 정치인이 여기 당신들을 위해 출현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풀지 못한 숙제를 풀 적임자이다. 잘못된 길을 걸은 적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누군들 그렇겠어. 다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그 과정에서 나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는 친구를 어떻게 내가 긍정적으로 도왔는가. 제21회 동흥제에 올렸던 우리의 연극, 제1회 동흥극회 상영작, '친구'가 그 상징적인 .. 2022. 1. 22.
당신의 이웃 vol.2 - (4) 4. 길어야 몇개월일 줄 알았던 김 부장님의 지방파견은 정권교체에 따른 개발계획 확장으로 최소 5년이 연장되었다. 바뀐 정권이 다음 대선도 승리하며 균형발전의 기조를 유지한다면 10년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김 부장님은 견디다 못해 조그만 원룸을 따로 얻기로 했다. 그만큼 집안 사정은 어려워졌고, 박 여사는 늘어가는 지병만큼 날이 바짝 섰다. 고등학교 생활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집단 환각에라도 빠진 것처럼 선생들의 주도 하에 모든 하루의 대화가 대학으로 시작해 대학으로 끝이 났다. 학생들은 그 혼돈의 충실한 일부가 되거나 아주 벗어나거나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해야했다. 애매하게 걸쳐있는 학생들을 밀어내든지 당기든지 하기 위해 온 세상이 지랄을 떨었다. 자신의 세계를 명확히 정한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의.. 2022. 1. 20.
당신의 이웃 vol.2 - (3) 3. 중학교 3년은 교내 도서관에서 살았다. 당시 교장은 국공립 학교 중 최고의 장서수준을 갖추기 위해 꽤나 많은 공간을 할애했고, 도서구매신청을 하면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전부 사들였다. 제목이 그럴싸하면 만화책이나 성인용 도서도 가리지 않았는데, 근로장학생과 사서 그리고 교무처의 담당 선생이 서로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신뢰의 사슬구조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 책들이 일단 들어오고나면 장학사나 교장선생님 등에게 발각되어 임의처분되지 않도록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구간에 재배치하는 것이 나를 비롯한 상주학생들의 비공식 업무였다. 내가 근현대 철학 부문 서가에 하루종일 쳐박혀서 책장을 헤집어놓아도 그 누구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그 책들을 읽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책 속의 인물들은.. 2022.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