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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효영 - Bloody Oscar (4) 4. 깊게 잠든 마을, 달빛만이 낮은 건물들 사이를 비춰주고 있다. 다 찢어져가는 천조가리 하나만을 걸친 여자가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카메라는 높은 곳에서 그녀의 뒤를 쫓는다. 끝내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나체가 되었지만 여자는 오히려 더욱 시야가 트인 곳을 향해 뛰어간다. 광장에 다다라 한쪽 무릎을 찧은채 무너지며 짐승처럼 포효하는 그녀의 정면을, 앞질러간 카메라가 클로즈업해서 잡는다. 오른쪽 젖가슴에 맞아있던 초점이 점점 멀어지며 시점이 어느 건물의 창틀 뒤로 넘어간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지만 아직 연기가 나는 담배꽁초가 창틀에 걸쳐져있다. “언니, 이제 남자친구 얘기는 그만 좀 해.” “너무 나만 떠들었다 그치? 네 생각은 어때? 진홍이랑 좀 친했지 않았어?” “내가 친한 사람 중에 언니가 아는 .. 2023. 9. 21.
(리뷰) 치히로 상 내 이름은 치히로, 섹스 샵에서 일하다 왔습니다. 나는 길고양이를 돌본다. 이름은 마담. 지금은 벤또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먹을 것을 챙겨주기 수월하다. 마담은 길고양이면서도 사람 손을 타서 털이 건강하게 수북하고 살도 토실토실하다. 평상에서 담벼락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기꺼이 카메라에 내어주는 그런 고양이. 어느 퇴근 길에 동네 못된 아이들이 집 없는 길노인을 못살게 구는 장면을 보았다. 나는 길노인 또한 돌보았다. 가게에서 파는 벤또를 건네주고 집에 데려가 씻겨주었다. 말끔해진 노인은 말없이 웃으며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길노인으로 돌아갔다. 그후로도 나는 노인에게 벤또를 챙겨다주었고, 노인은 어느 날 자신이 머무는 아지트를 소개해주었다. 폐건물 어느 층에 아늑한 아지트에는 만화책으로 가득찬 서.. 2023. 9. 20.
우주, 효영 - Bloody Oscar (3) 3. 유명인들의 신상을 파헤쳐 본인조차 몰랐던 사실들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유튜브 채널 '알권리협회'에서 지난 달에는 배우 '천우주'에 대한 영상을 다루었다. 황주덕 감독의 문제작 '오계절의 유언’을 데뷔작으로 시작부터 대형사고를 치며 국내외 영화제의 상을 휩쓰는데 일등공신이었던 배우 '천우주'는 진솔하고 수더분한 자세로 팬들과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정작 그녀의 과거 개인사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있어 북한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냐는 놀림마저 받곤했었다. 그러나 ‘알권리'의 그녀에 대한 주장은 꽤 문제적이었다. 천우주의 소속사 측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에 무응답으로 일관하다 지난 주 천배우 본인이 유튜브에서 라이브 방송을 켜고 처음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시청자들이.. 2023. 9. 19.
(리뷰) 바바리안 내가 에어비앤비로 빌려 묵기로 한 집에 이미 누군가가 들어와있다. 상대는 홈어웨이로 같은 집을 빌렸다고한다. 명백한 더블부킹인데 주인장은 연락도 안되고 동네 사정상 달리 방법도 없다. 불편한 동거를 해야지. 보통의 스릴러 영화라면, 이렇게 또래 성인남녀를 만나게 했으면 sexual이건 violence건 19금의 에센스를 곧장 뽑아냈을 것이다. 클리셰적으로 멍청해서 당할 수 밖에 없는 여주들과 달리 필요한 모든 방어조치를 최선을 다해 취하는 여주, 그럼에도 직업적으로 천생연분인것만 같은 남주, 잠깐 서로 입맛을 다지지만 아주 신사적인 방향으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하룻밤. 여기서 영화의 범상치 않음을 눈치챘어야 했을까. 요체가 조금씩 등장할때 난 이 영화가 ‘바바둑’과 ‘기생충’의 묘한 교집합의 영역.. 2023. 9. 18.
우주, 효영 - Bloody Oscar (2) 2.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 등대로 향하는 부둣길,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종윤을 잰걸음으로 따라잡는 소은. 낚아채듯이 종윤의 손을 잡아올린다. '이거란다' 소은이 속삭인다. 종윤의 눈이 흔들린다. 카메라의 샷이 클로즈 업으로 두 사람의 입김을 잡다가 서서히 멀어지며 버드아이로 바뀐다. 느린 비트의 드럼소리가 점점 커지며 현악기 선율이 들어오고 음악이 깔린다. 화면이 암전된다. "이 장면을 스무번을 찍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요? 배우님은 어떤 생각으로 스무번째 촬영에 임하셨을까요?" “구성은 단순하지만 이야기의 첫번째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감독님이 평소보다도 훨씬 세심하게 이것저것 디렉팅을 주셨고, 우리도 그만큼 집중했어요. 몇번을 찍었는지 숫자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한두번은 아니었죠 분명.. 2023. 9. 17.
우주, 효영 - Bloody Oscar (1) 1. "효진씨! 나 물어볼거 있는데!" "저 아니에요, 닮은 배우고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 그래...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 예민하게 반응하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피곤하긴 하겠다. 난 그냥 너무 닮아서 소름이 다 돋더라지 뭐야." "제가 그 감독이 취향이 아니라서요. 되게 인상적인 역을 맡았나봐요? 연기경력도 뭐 없는 배우라던데." "아유, 말해뭐해. 한국사람들 호들갑 떠는게 좀 유난이긴 하지만, 오스카? 뭐 그런 상 받는다는 얘기도 나오드만. 좋은 상인가? 아무튼 영화보는데 진짜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난. 좋은 의미로, 응응." 효진은 부쩍 늘어난 동생의 인기를 대신 실감하는 중이었다. 별 생각없이 길을 걷다보면 대뜸 멈춰서더니 갸웃거리며 다가와서는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2023.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