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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씨의 재판 1부 - (8) 8. 소리는 연우씨에게 다시 한 번 교수형 급속집행의 확정을 선고했다. 연우씨의 재심의 검사석에는 원래 예정되었던 오규남이 아닌 배인혁이 특별히 고용한 검사가 앉았다. 배인혁의 사람이 변호인석이 아닌 검사석에 앉아있다는 사실은 지난 4주 간의 특별 조사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 아무 쓸모없이 버려질 것임을 의미했다. 배인혁은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연우씨를 쏘아보고 있었다. 소리가 의례적인 선고문을 다 읽어갈때쯤 배인혁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법정 전체를 쏘아보더니 가장 먼저 일어나 법정을 떠났다. 그의 큰 덩치 때문에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부산스러웠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가면서 신음소리들을 유발했기 때문에 소리는 폐회의 문장을 읽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시키지 않았으면 자원.. 2022. 7. 3.
연우씨의 재판 1부 - (7) 7. 연우씨에게 남은 마지막 삼일 중 이틀 동안 연우씨를 살리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소리의 사무실로 많이 보고되었다. 조사관의 정식 공무를 거친 공문서의 형태도 있었고 연우씨의 이웃이라 주장하는 이가 보낸 편지들도 있었고 익명의 포럼에 투고된 형식의 것도 있었다. 그들은 일관되게 연우씨의 불우한 가정사와 7살 부근의 그가 무척 선량하고 유약한 소년이었으며 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주장했다. 연우씨의 부친이 거리에서 객사한 이후로 모친의 정신상태도 이상해졌으며 집안에서는 종종 비명에 가까운 곡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직접 얘기하지 않지만 암시하는 바는 분명했다. 모친이 나라에서 금지한 이단 종교인 발장교에서 배포하는 붉은 알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며 미쳐버렸다는 것이다. 발장교는 어디.. 2022. 7. 2.
연우씨의 재판 1부 - (6) 6. "정판사님, 일을 아주 거칠게 하시네요." 오 검사가 변죽을 올렸다. "동준이가 아주 열심히 살던 친구였는데, 졸지에 돈 벌어다주던 아들과 오빠를 잃은 가족들은 얼마나 슬플까요." "규남씨, 우리 일을 좀 세련된 방식으로 하자. 자기 이제 목숨도 몇 개 안 남았잖아, 그렇지?" 소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딱하다는 표정으로 규남을 쳐다봤다. "그 따위로 내려다보지 마 이 건방진..." "니가 키가 작은 걸 어떡하라는거니 그럼? 설치지말고 앉아있어. 너 그 친구한테 약점잡힌거 있지않아? 내가 니가 보낸 쥐새끼한테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았어? 오 검사님, 검은 약 드신지 좀 됐죠?" "개소리 그만둬!" 규남이 부들거리며 벌떡 일어났지만 법복을 두른 채 일어난 소리보다 키에서도 덩치에서도 한참 모자랐다. 소리.. 2022. 6. 29.
칠면조 온 더 블럭! 홍대는 홍익대학교의 준말이다. 그렇다면 홍대입구는 홍익대학교의 입구라는 뜻일 것이다.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해서 나는 그것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의식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겠다. 나에게 있어 홍대입구는 2호선 신촌역 옆에 붙어있는 지하철 역 이름이었으니까. 심지어 홍익대학교의 입구는 홍대입구 역에서 그렇게까지 멀지도 않은데. 어떤 이름들은 때로 그 본질을 넘어서기도 한다. 홍익대학교는 물론 훌륭한 학교일 것이다. 다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듣자하니 그런 것 같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 세워졌을 적부터 산학일체의 건립이념을 갖고있던 기관이다. 60년대 대학정비령의 칼날비 속에서도 미술학부의 입지만큼은 인정을 받아 살아남았고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앞으로도 그러겠지. 하지만 어느 알 수 없.. 2022. 6. 28.
연우씨의 재판 1부 - (5) 5. 3주차부터는 정소리 판사와 연우씨의 독대가 가능했다. 정소리 판사가 연우씨에게 사형 확정을 선고한 당일 진행된 면담 이후로는 처음으로 갖는 독대의 자리였다. 범죄자가 로비를 시도하거나 판사가 개인적인 연민을 갖게 됨으로 정당하지 못한 판결을 내릴 것을 대비해 둘은 제도적으로 만날 수 없게 되어있었는데, 특심의 과정에 있어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수뇌부의 판단으로 되살린 것이므로 많은 제약들이 사라져 연우씨는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가 될 수 있었다. 보다 넓은 자유를 주었을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려는 의도 또한 내포되어 있었다. “도저히 기억이 안 나요 연우씨?” 소리는 연우를 정중하게 대했다.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보다는 잘 설득해서 다시 교수대-급속집행을 받을 수 있도록 전략.. 2022. 6. 26.
연우씨의 재판 1부 - (4) 4. 특심에는 4주의 기간이 주어졌다. 이번 특심은 특히 예외적이었다. 집행이 확정된 형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은 관료체계의 수뇌부 중에서도 특임으로 구성된 최고위 관료에게만 있었다. 즉 현 총통 또는 그가 직접 임명한 각 공무 부처의 수석 및 차석 관료 중의 한 명이 형을 중지시켰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행 직전에 멈추는 일은 전무했으므로, 아마 그 자리에 참석해 관람을 하던 누군가 연우씨를 알아보고 그 자리에서 집행 중지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특심 동안에는 소리가 진행했던 재판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연우씨가 출생한 순간부터 현 시점까지의 모든 유의미한 순간들이 검토되었다. 3년의 집행확정 조사기간보다도 훨씬 많은 인력들이 투입되어 심층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2022.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