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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빠진 목탁 - (3) 3. 내가 첫 연애를 하기 전, 예의 그 토론 동아리에서 친해진 남자 선배가 있었다. 빠른 년생에 현역으로 들어와 나보다 나이로는 어렸지만, 개중에 나이치고 그나마 성숙한 편이기는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들을 전부 통틀어서 가장 또라이 같은 사람이었다. 특유의 말과 행동 습관이 몇 가지가 있어 주변 사람들이 성대모사 하듯이 그걸 유행어처럼 따라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게 자신인 줄을 몰랐다. 완전히 생뚱맞은 지점에서 극도로 분노하는 성격은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목탁 들고 다니는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얘는 무슨 지게를 지고 다닌다. 항상 로봇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술이 만취해도 얼굴 표정이나 색은 하나도 안 변하는데 몸이랑 정신은 취해서 남들이 시키는 대로 별 이상한 .. 2021. 11. 12.
바다에 빠진 목탁 - (2) 2. 결과적으로 생각보단 오래 사귀었지만, 진지하게 만날 생각도 없었고 스스로 만든 내 처녀성에 대한 환상에 취한 모습이 즐거워 보여 굳이 깨주고 싶지 않아서 멋대로 하게 뒀다. 2년 정도 사귀다 헤어졌는데 1년 반 쯤 되던 크리스마스 무렵 이 녀석이 드디어 직접 이야기를 꺼내더라. 자기 나이가 곧 스물넷이고 우리가 만난 지도 곧 연차로 3년차인데 가슴 정도는 보여 달라. 정 안 되면 보면서 혼자라도 하겠다. 연애 초기에 그랬으면 미친 새끼인가 싶어 바로 연 끊었겠지만, 함께 한 시간 동안 이 친구가 변해온 모습들과 나를 만나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알고 있다 보니 그마저도 갸륵하게 보였다. 밤의 제왕이 신부님이 되었다고 떠나간 친구들이 한 트럭이라고. 근데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내가 포기하라고 한 것 .. 2021. 11. 11.
바다에 빠진 목탁 - (1) 1. 나는 쉽게 흥분하는 편이다. 좀처럼 감정을 주체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무던한 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종종 내 뒤에 서 계시는 부처님이 보인다고 하기도 한다. 목탁을 두들기는 것과 목탁으로 두들기는 것 모두 나의 페르소나이다. 나의 목탁은 내 심장소리에 맞춰 무엇이든지와 끊임없이 부딪히기 위해 태어난 나의 분신이자 나의 정체성, 나의 사랑. 비유법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나만의 목탁을 행운의 부적처럼 침대 맡에 두고 살았다. 실제로 두들긴 적은 많지 않았지만. 참고로 나는 교회에 다닌다. 종교적 의미를 담아 두들긴 적은 없다. 내 지랄 맞은 성격에 대해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나의 괴벽은 파도에는 무던하지만 잔물결에 미친 듯이 요동치는, 비유하자면 흔들림의 총량을 보존하.. 2021. 11. 10.
달콤한 포도 (7) - 完 7. 주연이의 첫 남자친구는 나를 경계하기도 했고 나도 그 양반 인상이 별로라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어 데면데면 했다면, 두 번째 남자친구와는 둘이 결별한 지금도 가끔 안부 정도 주고받는 친분이 생겼다. 내가 그 게이 친구 ‘산’과 친해져버린 탓이다. 그 술집이 관계의 발단이었으니 언제 한 번 보자고 하던 게 추진이 되어 넷이 만나게 된 것이다. 이성애자 커플을 맞은편에 앉혀두고 나는 잘생긴 게이와 나란히 앉아있자니 더블데이트 하는 것 같고 기분이 묘했다. 뭐 어떤 기류가 있던 건 전혀 아니었지만, 눈치껏 빠져준다고 두 연인 보내놓고 우리끼리 먼저 나오는데 어색하고 그랬다. 하지만 산이 대뜸 우리 둘이 되자마자 혹시 섹스하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는 평정심을 잃고 경기를 일으켜버렸다. 짓궂게 웃으며 ‘저랑.. 2021. 11. 9.
달콤한 포도 (6) 6. 제법 탄탄한 체계와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던 우리 동아리는 자연스럽게 조금 시들해졌다. 차년도에 동아리를 이끌 예정이던 정수 형은 정관이 묶인 채 아버지가 되어버렸고, 나는 알바를 두 개나 늘렸다. 주연이가 연애를 하면서 본인이 동아리에 쏟던 관심이 일부 분산되기도 했지만, 그녀를 동경하며 상상연애의 팬심으로 활동하던 단원들 일부가 애정이 식어 떠난 영향도 분명 있었다. 회장 누나는 졸업과 취직을 준비하며 차기 동아리 운영을 자문하는 정도로 관심을 쏟을 생각이었는데, 본인의 사업을 운영하기로 진로를 틀며 시간이 많이 없어졌다. 졸업을 일 년 늦추고 경영학회에 들어가 네트워크와 기초 실력을 쌓기로 결정했다고. 그 와중에 교육봉사도 다니고, 오래된 애인과 연애도 하고, 정기적으로 할머니 병간호도 병행하니.. 2021. 11. 8.
달콤한 포도 (5) 5. 지난하게 늘어지던 여름이 거의 저물어가던 무렵, 나는 장학금 면접을 조졌고 주연이는 첫 연애를 시작했다.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의 추천을 통해 보게 된 사설 장학금 면접이었는데, 진솔함과 진정성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지나치게 솔직한 대화를 해버렸다. 나오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우리는 적선이 아니라 투자를 받을 사람을 찾고 있어요. 이건 우리 직원들이 뼈와 살을 갈아만든 겁니다. 돈이 아니라 혼이에요. 자, 학생은 이걸 받으면 그걸 어떻게 우리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갚을 수 있겠어요? 예? 최근에 사옥 매각으로 생긴 투기소득 세제혜택 받으려고 나눔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아 이건 패기가 아니라 싸가지였네. 무슨 생각으로 돈 많은 사람한테 까불었지. 후회막심하고, 또 살짝 겁에도 질렸다. 해코지는 안하.. 2021.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