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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 - (4) 13일 오후 11시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는가?" 이반의 복장을 생각하면 첫 질문으로 타당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검은색 폰을 움직이려고 했다. 나는 상관은 없지만 흰색 진영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관례라고 알려주었고, 그는 나에게 선을 양보했다. 나는 무난하게 킹 앞의 폰을 두 칸 전진하는 킹즈 폰 오프닝으로 게임을 시작했고, 그는 맞은 편 폰을 e5의 위치에 옮겨놓는 오픈 게임으로 응수했다. "무언가를 판매하는가?" No. 나는 오른쪽의 나이트를 f3의 위치로 보냈고, 이반은 이번에는 점대칭의 위치에 있는 말을 전진시켰다. 나는 전략 같은 것은 몰랐지만,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는 어떤 상황은 상상할 수 있었다. 내 목표는 나이트를 f7의 위치로 보내 검은 여왕과 루크를 동시에 노리는 것.. 2022. 7. 20.
여행의 목적 - (3) 13일 오후 8시 원래의 계획은 자메이칸 음식점을 들렀다 재즈 바에 가서 오후 8시에 시작하는 라이브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7시 반에 정신이 들었으니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했다. 에서 알 파치노는 이렇게 말했다. '스텝이 꼬이면, 그게 탱고다.' 그래, 일정이 꼬이면 그게 재즈지. 나는 재즈 바를 포기했다. 시애틀은 비교적 안전한 곳이지만, 길거리에 주차하는 것을 꺼릴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노상 갱단이 처벌받지 않고 활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벌 그게 뭔데 싶은 약에 취한 자들이 불유쾌한 접촉을 감행할 가능성은 어쨌든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함부로 사람을 겨누고 쏘아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총기 소지가 합법인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A사의 지하에 주차를 하고 1마일 정도를 걸어가기로 했다. 겸사겸.. 2022. 7. 17.
여행의 목적 - (2) 13일 오후 1시 점심에는 스노콸미 산을 올랐다. 약 5마일정도 되는,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가벼운 코스였다. 봄이 한참 지났지만 시애틀은 북쪽에 있는 지역이고, 산을 오르며 지면의 복사열과 멀어질수록 기온은 더욱 떨어진다. 중턱 즈음부터는 겨울이었는데, 곳곳에 녹지않은 눈들이 쌓여있었고 저 멀리 높은 곳에는 영영 녹지않는 만년설이 드리웠다. 여름에도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생태학에 문외한인 나에게 스노콸미 산의 색감은 그저 동화같았다. 서서히 녹아내리는 눈 때문에 다습한 환경이 유지가 되어 짙은 녹색의 이끼들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만연했다. 두꺼운 나무들이 군데군데 잘려나간채 쓰러져있었는데 속살이 새빨갰다. 가스관의 선명한 빨강색과는 달리, 생고기의 속살을 찢어 약간의 갈변과정이.. 2022. 7. 16.
여행의 목적 (1) 12일 오후 2시 사람들은 오늘이 흘러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오늘과 같은 내일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입버릇처럼 '이대로 영원히'를 꿈꾸다가도, 정말 지금 이대로만 영원히 같은 날들이 반복만 되는 꿈을 꾼다면 온 힘을 다해 손가락을 까딱여 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홀린 듯이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항공편을 예매했다. 저렴한 가격대 중 가장 빠르게 출발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출국날 공항에서는 경유지에서 꼬리를 자르고 시애틀로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고, 곧장 표를 끊어 행동으로 옮겼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지난 날 내가 두고 온 것들이 시간의 옷을 두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시애.. 2022. 7. 13.
연우씨의 재판 1부 - (10) 完 10. 총통이 죽었다. 자연사였다. 총통의 죽음이 체제의 혼란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총통 개인이 가진 권력의 크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지만, 오랜 시간 다듬어진 시스템이 그의 부재를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공식적인 외교의 자리에서 한번 졸도한 이후로는 위기관리 특별국이 총통의 승인 하에 신설되어 수많은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지나가던 길고양이를 총통의 자리에 앉혀놔도 당분간은 나라가 기능할 수 있도록 공을 들여 설계해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심함은 현 정부의 특임 관료들이 체제가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주는 동안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지, 자신들의 황금기를 억지로 연장하거나 혹은 불가능한 영생의 권익을 추구하기 위함은 아니었기에 정권의 교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현 정부 내의 인사들이 .. 2022. 7. 9.
연우씨의 재판 1부 - (9) 9. 장내에 방송이 나오자 연우씨는 제 발로 당당하게 햇살을 향해 걸어나갔다. 두번째 교수대를 찾은 그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것처럼 행동했다. 매일 아침 해오던 운동인것마냥. 그런 그의 의연함이 사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억지스러운 자기 세뇌로부터 오고있다는 것을 소리는 알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서사를 불어넣고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기록관이 유출한 어제의 대화 내용들 위에 살을 입혀서. 기록관이 거기까지 계산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던져 현 총통의 정부를 향해 살을 쏘아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 정부에 대항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시민단체들과 야당의 인물들이 그녀를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할 것이다. 현 .. 2022.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