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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씨의 재판 1부 - (3) 3. 소리의 방으로 세 알의 검은 약이 배달되었다. 보안국 소속의 하급 관료가 은색 트레이 위에 디저트처럼 접시에 담아 서류와 함께 방까지 가져왔다. 앙증맞은 리본이 달린 반구형 덮개가 씌여진 모양이 온갖 장식에 환장하는 현 수뇌부의 악취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들은 교수대에 사용하는 밧줄에도 나비넥타이를 달고 싶어했으나 시민단체와 야당의 반발로 무산된 바가 있다. “뭔데 세 알이나 가져왔어? 나보고 일만하다 뒈지라는거야?” “요즘 일이 바쁘시…” 소리는 나이어린 보안국 관료에게 쏘아붙이면서 그 중 두 알을 집어 물과 함께 삼켰다. 관료는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 입술을 꿈틀댔지만 소리가 손가락을 들어 입 다물고 있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법관들은 대개 속이 시꺼멓고 성깔이 드러우며 잘못 걸리면 없는 죄도 .. 2022. 6. 22.
연우씨의 재판 1부 - (2) 2. 연우씨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다. 아니 있었다. 연우씨는 그녀를 연희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더이상 그 이름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새로 받은 이름인 정희로 십칠년을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꾸준히 복용해 온 하얀 알약 때문에 어릴 적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다섯살 때의 사건 하나가 있었다. 그녀의 오빠가 홀로 오누이를 키워준 어머니를 느리고 잔혹하게 살해했던 것. 무딘 가위로 두눈을 포함해 일곱 군데에 자상을 냈으며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 애원하는 어미를 뒤로하고 미친 짐승처럼 온 집안을 헤집어놓다 부엌칼을 들고 돌아와 다시 스무번의 칼질을 통해 끝을 내버린 사건. 오빠가 일부터 이십까지 세는 것을 똑똑히 듣고있던 탓에 정희는 .. 2022. 6. 19.
연우씨의 재판 1부 - (1) 1. “연우씨, 제 얼굴 봐요. 이거 이렇게 덮어놓으면 눈앞이 보이나, 연우씨, 들려요?” 주황색 두건을 뒤집어 쓴 젊은 청년의 숨소리가 무겁다.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미세하게 부들거리는 몸의 진동이 연우라고 불린 청년이 느끼고 있는 긴장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 모습은 온 세상에 방송되고 있었다. 보조 집행관의 역할을 맡은 정소리 판사는 연우씨가 자신의 몫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었다. 연우씨에게 위안이 되는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똑같이 주황색 옷을 입은 동료들이 이미 앞에 네명이 갔고, 뒤에는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보조집행관이, 왼쪽에는 근육과 곤봉으로 무장한 안전담당관 곤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2022. 6. 18.
주사위 놀음 - (ABC) A&B&C. 605호 청년은 직장 상사로부터 1301호에 사고가 생겼으니 급하게 좀 살펴봐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살고있는 곳이 회사 소유의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다소 황당한 요구에 당황한 청년은 손에 아직 덤벨을 들고있다는것도 잊고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그 방에는 가끔 마주쳤던 705호 학생이 내가 예전에 모신 적 있는 중년의 중국인 손님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완력으로는 중국인이 보다 앞선 것 같았지만 청년의 눈빛에 맛탱이가 가있는 것이, 광기로부터 한계 이상의 괴력을 끌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모자란 20kg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저런 절실함이었구나, 감탄하며 잠시 넋을 놓고 있자 중국인이 고함을 쳤다. "어서 치우지않고 뭐해!" 그제야 정신이 든 청년은 학생을 중.. 2022. 5. 21.
주사위 놀음 - (C-2) C-2. 세상의 법 위에 서기 위해 법이 필요하지 않듯, 어떤 일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그 일을 반드시 잘 하거나 심지어 잘 알 필요조차 없다. 내가 IT회사의 대표이듯 말이다. 나의 회사는 물건을 판매하고 회수하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구매욕구를 돋군다. 실적이 높은 고객들을 대상으로 사용후기로 제작된 영상들을 보여주면 그들은 더욱 충성스러운 고객이 된다. 영상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나와 나의 사냥개들이 낚아올린 물고기들이다. 내 작품에 출연하는 대가로 나에게 도리어 돈을 가져다바치며, 그것을 잠시 가려주는 대가로 꾸준히 소량의 돈을 지불하기도 한다. 나는 그들을 비틀어 짜서 망가뜨리지 않는다. 브루잉을 하듯이 공을 들여 천천히 오래가는 동행의 관계를 맺을 뿐이다. 가끔 뜻밖의 선물도 .. 2022. 5. 20.
주사위 놀음 - (B-2) B-2. 간단한 설문 문항에는 당연하게도 적어서 남에게 보여줘야 하는 개인적인 사생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차마 최근 성관계 빈도에 '3년간 1회'라고 적기가 민망해 '8일에 1회'라고 거짓말을 했고, 관계에 대한 만족도라던가 파트너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을 지어서 써냈다. 컴플렉스를 극복해야 파트너를 구하던가 말던가 하지. 지원을 하고 며칠 뒤 모집대상에 선발되지 못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렇게 일상의 돈벌이에 다시 집중하고 있던 차에 잘못된 유혹에 잠시 넘어갔다. 군대 선임들이 얘기하던 소위 '사다리'방에 관한 꼬임에 홀랑 넘어가버린 것이다. 50만원을 넣으니 10만원어치 포인트를 서비스로 주었다. 이대로 빠져도 가만히 앉아서 10만원을 번 것이다! 이야, 임상실험보다 좋다! 나는 그 10만원을 .. 2022. 5. 18.